지난 12월 14일,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2백만 군중 속에 한 젊은 여성이 스케치북에 이런 글귀를 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가만히 있지 않게 되었고, 이태원 참사로 인해 밀집된 곳에서의 대처법을 배웠다. 그리고 12월 3일에는 민주주의마저 잃을 뻔했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걸 잃어야 하는가?”
윤석열 퇴진 집회에는 4.16세대인 젊은 층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첫 번째 계기로 세월호참사를 꼽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책임 회피만 하려고 한 정부와 국가를 목격한 세대들입니다. 4.16 세월호참사 10년이 되는 2024년이 독재자를 몰아내는 일로 저물고 있습니다.
사고 프레임에서 사건 프레임으로
세월호참사 이전에는 ‘재난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충격적인 재난 참사가 빈발했습니다. 그러고도 재발방지대책을 만들지 못해서 비슷한 유형의 재난 참사가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런 대한민국을 과거의 재난(후진국형 재난)과 미래의 재난이 복합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특별히 위험한 국가’라고 지적했습니다.
재난 참사를 대하는 대한민국의 공식 같은 것이 있습니다. 수백 명이 죽는 대형 재난 참사가 발생해도 빨리 보상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상자들 치료하게 해주는 것으로 끝을 내왔습니다. 참사마다 사건 백서가 나왔지만, 어떤 백서도 참사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 기술하지 않은 ‘맹탕백서’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재난 참사의 원인을 찾고, 그를 규명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사고이니 빨리 수습하고 일상으로 복귀하자는 ‘사고 프레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참사는 빨리 잊고, 지워져야 할 것이었고, 참사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위령탑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사고 프레임’이 ‘사건 프레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미 시민들의 의식 속에는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건 프레임은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부상자 치료만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공동체의 회복까지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세월호참사 이후에 피해자와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진상규명과 책임차 처벌을 외쳐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재난 참사 처음으로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되고, 한시적이지만 3번의 국가 조사기구가 설치되어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집요한 고발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진상규명 작업은 미완이며, 책임자들은 허술한 법망을 잘도 빠져나갔다. 물론 애도와 기억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장소에 추모와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해자와 시민들의 의식은 높아졌지만, 아직 국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고 프레임’을 고수하는 기득권세력이 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재난을 대하는 시스템의 변화를 주기 위한 입법도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10.29 이태원참사가 발생했고, 7.15 오송지하차도참사도 발생했습니다.

피해자의 권리의 발전
세월호참사 이후 10년 동안 피해자의 권리가 제시되고, 발전되어 법률에도 반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호참사 이전에는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습니다.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이하 국민대책회의, 4.16연대의 전신)는 피해자의 권리에 주목했습니다. 그동안 피해자들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부와 지자체의 ‘동정과 시혜’에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잘못으로, 시스템의 잘못으로 발생한 재난 참사에서 피해자들의 권리 규정 자체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시민들은 피해자의 권리를 발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입니다.
국민대책회의는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서 2015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피해자와 시민들이 가질 권리에 대해서 국제인권기준을 검토하고, 1백 번이 넘는 시민토론을 거쳐 이 선언을 발표한 것입니다. 전문과 1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선언의 주요 내용이 최근 제정된 10.29이태원특별법 제3조(피해자의 권리)에 반영되었습니다.
또, ‘중대재해처벌 법안’ 제정 운동이 세월호참사 초기부터 시작됐고, 그 캠페인은 시민들의 안전의식을 고양시켰습니다. 그런 덕분에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을 이룬 뒤, 중대재해처벌법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중대 재해, 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시민재해의 책임을 윗선에 물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해서 탄생한 이 법률을 정부와 기업이 반길 리 없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에서는 이 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고, 이 법률을 지켜내는 일이 시민사회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시민사회는 ‘생명안전기본법안’을 내놓았습니다. 먼저, 이 법안에는 안전권과 피해자의 권리를 법적 권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환경영향평가제도처럼 ‘안전영향평가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와 같은 규제로 기업의 활력을 위축한다는 이유로 철폐시키는 일 같은 것을 막고자 합니다. 법과 제도, 정책을 시행할 때는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이 없는지를 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또 독립적인 ‘중대사고 조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독립적이고, 상설적인 조사기구가 제대로 작동되어야 제대로 원인 규명도 하고, 재발방지대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중대 재난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특별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따른 한시적인 조사기구를 만드는 것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축적된 전문성에 기초하여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조사기구가 대안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시민들의 알 권리와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재난 거버넌스의 원칙들도 담았습니다.

지속되어야 할 투 트랙의 운동
지난 10년의 4.16운동은 투 트랙(Two Track)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하나의 트랙은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의 길입니다. 세 번이나 조사기구가 가동되었지만, 진실규명은 아직 미완이고, 책임자들은 대부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과제를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주체 형성이 필요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쨌건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의 트랙은 ‘생명존중-안전사회’의 길입니다. 지금까지의 이 분야는 산발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시민사회의 전략적 목표를 합의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힘의 집중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시민운동 분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산업재해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조합 세력과 기후 위기에 맞서는 기후정의 세력들과 연합해야 합니다.
특별히 위험한 대한민국을 책임지는 정치세력들은 너무 안이하고 무책임합니다. 이런 국가를 변화시키고, 재난 거버넌스를 실질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4·16재단은 진실규명-책임자 처벌을 위한 노력들을 지원하고, 생명존중-안전사회 운동의 허브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4.16생명안전공원을 제대로 설립해서 이곳을 운동의 거점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앞으로 10년은 4·16재단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야 합니다. 재단의 슬로건은 “아이들이 맘껏 꿈꾸는, 일상이 안전한 사회”입니다. 이 슬로건이 향하는 목표지점은 어디일까? 우리는 그 목표지점을 향해 어떻게 가야 할까? 앞으로도 갈 길이 멉니다.

*2024년 4·16재단 연차보고서에 담은 기획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