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왼손’_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 하지마.

시민안전의식 향상을 위한 재난지원

시민 활동을 주제로 한 콘텐츠 공모사업

모두의 왼손은
재난참사 현장에서 피해자를 돕는 시민들의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문학·예술 작품 등으로 표현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공동체 의식 함양을 위해 진행된 공모전입니다. 약 한달 간 진행된 공모전에는 구술부터 산문 수필을 아울러 음악, 만화, 애니메이션 등 총 121작품이 출품됐습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받으며 총 13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 저작권 및 편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변형, 편집 등은 불가한 점을 알립니다. 

한두 개 달린 댓글들은 파급력이 강했다. 그 한두 마디에 엄마아빠는 순식간에 피해자에서 자식 팔아먹는 부모가 됐다. 피해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피해자의 장기적인 항의행동은 세금 떼먹는 행위일 뿐이었다. 심지어 몇 사람은 기업을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부모님을 진상 손님이라고 했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도 가족이었지만, 우리의 범주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피해자와 부모는 양립할 수 없는 어려운 존재였다.
「왼손잡이의 삶」 中

문학 분야에서 우수상한 정해인님과 한유미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사회적 재난 참사가 녹아나 있을까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아들로 살아가는 ‘명준’의 시선으로 풀어낸 「왼손잡이의 삶」은 그날 사건 이후로 부모님께 나쁜 말을 내뱉을까라는 염려와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그 어떤 변명도 소용없다는 환멸감에 말을 잃어버린 명준이의 담담한 자기 고백이 이어집니다. 정해인님은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습기살균제로 아이를 잃은 부모는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더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시위에 나가는데 세상은 지겹다고 합니다.”
언론의 외면과 대중의 기억 속에 잊히는 동생의 죽음을 위해 활동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왼손잡이의 삶
정해인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 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 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나 왼손잡이야”
명준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뽑았다. 좋은 노래라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놨던 노래였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들을 때마다 기분이 구려, 끝까지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됐다. 안 망치기는 무슨.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잘 모른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며 귀에서 뺀 이어폰을 마구잡이로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아침부터 울적하더니 먹구름이 더 몰려왔다. 명준의 기분이 하늘이라면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만 같았다. 주머니 속 손을 빼지 않은 채로 괜히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가 폈다. 입을 움직여 에라이 하고 중얼거리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런 의미 없는 말조차 소리 내어 말하기에는 명준의 성대가 움직여주지 않았다. 말 한마디 못하는 바보가 된 저 자신이 다시금 느껴져 기분이 더 구려졌다.  
*
명준이 입을 다문 것은 일 년 전부터다. 속으로 소리 내어 말할 때는 조금도 망설이는 법이 없다. 하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소리가 나오려고 하면 입이 딱 붙어버린다. 예, 아니요로 대답할 법한 간단한 질문에도 답하지 못할 정도. 그래서 막 고등학교를 입학한 1년 전에는,
“명준아, 제발 예 아니면 아니요 이것만 대답해라. 어?”
담임 선생님이 최소한의 선택지를 주었음에도 ‘예. 예입니다. 예. 예. 예.’ 하고 입에서만 맴돌아 결국에는 종이와 펜이 앞으로 툭 떨어졌다.
“차라리 써라. 어? 쓰는 건 할 줄 알 거 아냐.”
그렇게 나는 종이와 펜으로 대답하는, 말 못하는 벙어리로 거듭났다.
학교의 공식적인 벙어리로 거듭났음에도 열정에 타오르는 몇몇 선생님들은 내가 한 마디라도 말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이 수업 시간에 꾸준히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건 몇 년도에 발생한 일이야? 명준이가 대답해보자.”
“…….”
“책에 나와 있잖아. 어려운 거 아니야.”
“……”
일방적인 질문만 던지다가 수업을 끝낸 역사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고 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그래 가지고 사회 나가선 어쩌려고 그래. 취직 못하는 건 나중 문제고 대학도 못 가. 면접시험 보면서도 ‘나 사연 있어요’하고 앉아있을 거야? 사람들은 네 사정 궁금해하지 않는다니까? 사내자식이 언제까지 지난 일에 붙들려 있을 거야?”
나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 마음속으로는 당신도 걱정해주는 척할 뿐이지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콧방귀를 뀌었다. 지난 일이라니. 집에서는 밤만 되면 아직도 안방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그게 지난 일이라니. 
*
 2009년 2월, 명준은 쭈굴쭈굴한 대추를 마주했다. 빨갛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대추. 사실 대추가 아니라 신생아실에서 막 나온 동생이었지만. 명준은 동생이 신기했다. 엄청 작은데 숨을 쉬어. 엄청 작은데 꼼지락거리네? 명준은 동생이 아니라 특정 생물을 관찰하고 일기라도 쓰는 듯이 동생을 봤다. 명준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게 태어난 동생이라, 명준은 명은을 귀여운 강아지 보듯이 아껴주곤 했다. 엄마아빠는 서툰 부모의 첫 아이로 태어난 명준이에게 못 해줬던 것을 명은에게 만큼은 다해줘야 한다는 사명이라도 가진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그 예로는 TV에서 선전하는 “내 아기를 위하여!”라는 광고 문구에 홀리듯이 가습기살균제를 산 적이 있다. 엄마가 광고 문구 한 줄에 넘어가는 팔랑귀라는 소리는 아니다. 당시에는 가습기를 사용하다 보면 물때가 껴서 위생상 좋지 않다는 말이 많았고, “내 아기를 위해서!” 같은 문구로 엄마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가습기살균제 광고에 힘입어 아이를 위해서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부모들에게 가습기살균제를 산다는 것, 사용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명은이었는데.
명준은 가끔 생각한다. 흔히 보는 남매들처럼 치고받았어야했나. 아니 치고받기에는 명은이 너무 작았으므로, 괜히 간질여보며 곤히 자는 명은이를 괴롭히기라도 해야 했나 하고 말이다. 명준과 엄마아빠가 애지중지 아끼기만 했던 명은은 강아지만큼도 살지 못하고 훌쩍 가버렸다. 
 우리 가족 사이에 명은이의 죽음은 금기어라도 되는 듯이 여겨졌다. 누가 명은이의 죽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면 큰일이라도 나듯이. 그래서 명준도 평소와 똑같이 지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이랑 PC방에 갔다가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학습지 푸는 똑같은 일상을 보냈다. 그때는 친구들이
“명준, 괜찮아?”
하고 위로해주면 
“그럼 괜찮지. 안 괜찮냐?”
하고 맞받아칠 수 있는 정도였다. 
혹은
“명준이 동생 태어나자마자 죽었대. 태어날 때부터 병이 있었는데 그 병 때문에 한순간에 죽었나 봐.”
같은 헛소문이 돌아도, 어차피 사실이 아니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명은이가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그게 뭐가 중요한가. 사람은 그 사람만의 운명을 타고난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명은이는 명은이의 운명을 따라간 거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명은이가 병이 있어서,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진짜 명은이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
 2011년 봄, 산모들 사이에 유행한다는 괴질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아산병원 호흡기 중환자실에는 출산 전후의 여성 6명이 이 병으로 입원해있었는데, 1개월 안팎의 가벼운 호흡기 증세로 시작하여 어떠한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는 호흡 전과 폐 섬유화의 급속한 진행이 이들의 공통된 증상이었다. 손쓸 새도 없이 환자들이 죽어 나가자 의사들은 혼란에 빠졌고, 전국의 산모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신종 바이러스에서 일본의 방사능까지, 알 수 없는 병의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과 염려의 글이 쇄도했고 전문가들은 ‘근거 없는 과장’과 ‘자극적인 언론 보도’를 자제하라고 주문했다. 몇 년 전부터 영유아에게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이 병은 산모와 영유아에게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은 질병관리본부에 여태까지 보고되지 않은 이 특이한 질병에 대한 역학 조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마침내 같은 해 8월, 가습기에 사용하는 물에 첨가하는 살생물제, 이른바 가습기살균제가 괴질의 원인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해 겨울 가습기살균제는 시장에서 철수됐다. 그때부터 명준은 입을 다물었다. 
 명은이가 살해된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왜 그런 걸 팔아서. 왜 그런 걸 만들어서. 하고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한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불이 거세지면 불똥이 튀듯이 명준의 분노도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엄마가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명은이가 죽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부모님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명준은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입을 스스로 닫아버렸다.
 영유아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이의 건강과 위생을 관리하기 위해 가습기과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 그건 명준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명은이를 위해서. 하지만 명은이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죽었고, 그로 인한 피해자라는 사실은 단순 명은이의 억울한 죽음이 아니었다. 명은이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하는 것은 부모의 실패였다. 명준의 부모님은 돌봄의 실패에 대한 재확인이라는 점에서 고통스러워했다. 
*
전례 없던 피해 상황 속에서 명준의 부모를 비롯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억울한 죽음과 부모 역할 실패 사이에서 괴로워할 때, 여전히 많은 가습기살균제 제품과 화학물질, 그리고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질환 간의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사건의 해결은 좀처럼 진척이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엄마아빠는 피해자와 명은이의 부모라는 역할 관계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했다. 명은이가 짧은 생을 마무리 지은 후, 엄마아빠는 명은이가 법과 제도상 인정받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될 수 있도록 한 주도 빠트리지 않고 매주 시위에 나가고 SNS에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에 관련하여 글을 올렸다. 그것만이 명은이의 죽음과 슬픔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여겼다.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2016년 옥시 불매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많은 가습기살균제 제품과 화학물질, 그리고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질환 간의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사건의 해결은 좀처럼 진척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다. 엄마아빠는 들어주는 이 없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의 현장 속에서 오로지 시위와 SNS에서만 얘기할 수 있었다. 
 명은이의 죽음과 피해를 잊지 않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신문기자인 아빠가 단 몇 줄이라도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기사로 실을 수 있길 바랐지만, 기업의 광고를 받고 운영해야 하는 신문사 입장에서는 그런 아빠를 귀찮아했다.
“명호씨, 과학적으로 증명 안 된 일을 기사로 실었다가 우리만 역풍 맞으면 어떡할 거야. 김 기자가 책임진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고. 이러다가 이 회사에서 광고 끊기면 어떡할 거야? 그 돈까지 책임질 수 있어?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알겠어?”
“편집장님, 제발요. 제 사정 다 아시잖아요. 아빠인 제가 우리 명은이 죽음은 묻어놓고 다른 기사 쓰는 게 말이 됩니까.”
명은이의 죽음으로 직장에서 실랑이를 이어가던 아빠는 결국 신문기자에서 물러나 명은이 아빠로서의 책임을 지기로 했다.
 자신이 신문기자임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던 아빠가 신문기자에서 물러날 만큼 명은이의 죽음을 밝히는 데에 강경한 입장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은 본인들이 명은이의 피해를 밝히기 위한 행동을 혼란스러워했다. 단순히 산모와 영유아에게 발생한다고 생각됐던 병이 가습기살균제에 의한 피해임이 밝혀진 초반에는 대중과 언론이 함께 분노해줬다. 하지만 그 열기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피해자들이 외쳐도 다양한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입장만 반복하며 책임을 피하는 기업과 국가의 태도는 가습기살균제 사건 자체가 언론에게도 외면받고 대중의 기억 속에서도 점차 잊히게 만들었다. 변방의 외침이 지겨워진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시위에 나가고 SNS에 글을 올리는 부모님을 보고 돈 받으려고 명은이의 죽음을 팔아먹는다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는 다 집 안에서 관리 못 해서 생긴 거 아님? 부모가 잘 알아보고 샀어야지 괜히 피해자랍시고 몇 명 나오니까 이런다ㅋㅋ 내가 낸 세금으로 피해보상 받아서 처먹으려니 맛있으세요?
 -계속 이러는 거 지겹지도 않나;
 한두 개 달린 댓글들은 파급력이 강했다. 그 한두 마디에 엄마아빠는 순식간에 피해자에서 자식 팔아먹는 부모가 됐다. 피해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피해자의 장기적인 항의행동은 세금 떼먹는 행위일 뿐이었다. 심지어 몇 사람은 기업을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부모님을 진상 손님이라고 했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도 가족이었지만, 우리의 범주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피해자와 부모는 양립할 수 없는 어려운 존재였다. 
 그 시선은 부모님이 상대하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명준이의 사회에서도 똑같았다. 죽음보다 생명과 거리가 더 가까운 나이의 아이들 특유의 무심한 궁금증은 어른 사회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쟤는 벙어리 됐는데 쟤네 부모님은 동생 때문에 쟤 방치한다?”
“진짜 불쌍해. 남은 자식이라도 지켜야지. 그냥 부모한테 버림받은 거지 뭐.”
“한동안 학교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사건 알아달라고 전단지 돌렸잖아. 그때 쟤는 안 창피했을까? 난 솔직히 우리 부모님이 아무리 간절해도 전단지 돌리면 민망할 듯.”
명준은 아니라고, 너네가 안 겪어봐서 모르는 상황에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가습기살균제는 그렇게 잘못된 기억만 남기고 언론에도 외면받고 대중의 기억 속에서도 점차 잊혀졌다.  
*
광화문이라는 공간은 마치 시대정신 같았다. 명준은 시위에서 종종 마주쳐 얼굴을 아는 피해자 가족에게 눈인사를 건네다가 뒤로 지나치는 한 무리의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과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들을 봤다. 같은 세대 사람이라는 건 결국 이 공간의 감각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사람들은 화가 날 때, 목소리 높여 할 말이 생길 때, 혹은 촛불을 밝혀 변화를 기다릴 때도 광화문으로 나섰다. 이 광장이 단지 왕조의 안뜰이었던 때는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해명 촉구 플랜카드가 만든 물결 뒤로는 노란 리본이 추위도 없이 나비처럼 앉아있었다. 진심은 지구력이 강했다. 
 꾸준히 모인 진심은 유명한 유튜버가 촬영한 영상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메이저 신문사와 방송국들이 매일 취재하러 오는 것은 물론, 시민단체들의 적극적 참여에 힘입어 몇 가지 결실을 낳았다. 검찰 조사 재개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가습기살균제 불매운동이 퍼져나가며 그전까지 감소하고 있던 피해 신고율도 급격히 증가해 사건의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피해자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재난’으로 규정되며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시행됐다. 한 단계 폭넓은 피해구제가 이루어진 거다. 급물살을 타고 있는 여러 조치들을 환영하기보다는 이 시간을 맞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에 대해 사회적 반성이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명준은 좋았다. 사기꾼이라고 하던 사람들, 돈 뜯어먹으려고 명은이를 팔아먹는다고 하던 사람들에게 증명한 기분이었다. 거 봐, 우리를 도우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어떤 사람이 사기꾼을 도우니? 우리는 억울한 세상을 바꾸려고 모였어. 긴 시간 동안 외로웠지만, 진심은 어떻게든 통한다고. 명준은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걸 입 밖으로 외쳤다.
 “명은아! 우리 진심이 통했어!”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 모순의 집약이고, 세월호 문제를 푸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상인역에서 올라오던 30대 중반의 한 아주머니가 먼저 사회적 문제를 담은 피켓은 스쳐보는 듯 걷더니, 세월호 피켓을 보고는 갑자기 편의점에 들려 우유와 초코바를 사서 주고 갔다고 한다. 
일인시위를 100일 넘게 진행하면서 상인역을 지나는 주민들 대부분이 두 부부를 알아보는 것은 물론 수고한다고 음료수나 우유를 사주고 가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박기일 씨가 여러 일화 중 이 일을 특별히 얘기한 것은 그만큼 시민들의 마음 속에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아픔과 진상규명을 바라는 마음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잊지 않고 있어요, 그 날의 약속」中

다음은 문학 분야 구술에서 수상하신 한유미님입니다.

한유미님은 기록의 힘을 알고 그를 실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잊지 않고 있어요, 그 날의 약속」이라는 구술 기록을 출품했습니다. 해당 작품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구사람들의 인터뷰를 그대로 옮겨 담아 놓은 기록입니다.
이에 한유미님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글은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대구시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것입니다.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번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세월호 참사 3주기에 시작하여 4주기에 완성하였습니다. 재난 참사 피해자 당사자의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곁에서 아픔을 공감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우고 있는 피해자 분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기를 바랍니다.”

심사위원님들의 평가 역시 같았습니다.
“정성이 없다면 쓸 수 없는 기록입니다. 진정 필요한 기록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유미님의 구술 기록을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버튼을 눌러 주세요!
「잊지 않고 있어요, 그 날의 약속」 작품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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