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참사 발생

4.16재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성과 마음을 쏟아준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다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아픔과 경험을 통해 사회가 더 나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참사 발생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참사 발생

 

우리의 기억 속에 대구지하철중앙로역화재참사(이하 대구지하철참사)는 어떻게 남아있을까. 참사가 발생한지 16년(2019년 기준)이 지난 오늘 키워드 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남아있는 기억은 세 가지였다. 지하철에 불을 질렀던 ‘방화범‘, 키를 뽑아 열차 문을 열지 못하게 하고 본인은 탈출했던 ‘기관사‘,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보냈던 안타까운 ‘메시지‘까지.

대구지하철참사의 오늘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지 궁금을 안은 채, 대구에 있는 「 2.18안전문화재단 」 (이하 2.18재단) 을 방문했다. 재단 운영의 경험과 지혜를 얻고자 찾아간 이곳에서 우리는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너무나도 닮아있는 두 참사의 현재를 느낄 수 있었다. 대구지하철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그날 이후 겪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우리의 이야기와 같았다.

 

미안합니다

 

대구지하철 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2.18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 전재영님
대구지하철 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2.18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 전재영님

 

2.18재단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철도 참사인 대구지하철참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피해자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유가족과 지역사회가 마음을 모아 만든 재단이다. 우리는 2.18재단의 사무국장으로부터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대구지하철 참사로 아내와 딸을 한 번에 잃은 유가족이었다. 지역도 달랐고, 철도와 해상에서 벌어진 참사라는 점에서도 달랐지만 가족을 사고로 잃어버린 아픔은 같았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아픔을 이미 경험한 그는 “저희와 같은 아픔을 겪게 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재단을 설립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지...
재단을 설립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지…

 

저희에게는 아직

많은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정재영 사무국장을 통해 들은 내용은 일반적으로 언론을 통해 들었던 내용과 많이 달랐다. 특히,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 전파되었음을 지적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지하철에 불을 지른 방화범과 키를 뽑아 문이 닫혀 탈출하지 못하게 했던 기관사를 욕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 방화범 김대한이 방화를 저질렀던 1079호 열차에서는 한 부부만 희생되셨다. 같은 열차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대피에 성공했다. 진짜 큰 피해는 당시 진입하던 반대편 열차. 1080호 열차에서 발생했다. 역무원이 2분 만에 사태를 파악해 종합사령실로 신고를 했으나, 종합사령실은 진입하는 열차에게 들어올 때 ‘조심해서 들어오라‘라는 의미 없는 지시만 내렸다.

환기가 되지 않는 지하철 특성상 화재사고가 발생하면 열차는 진입하지 않거나, 정차 없이 바로 통과하는 것이 매뉴얼이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중앙로 역으로 1080호 열차가 진입했다. 역사 안은 이미 유독가스로 가득 차있었고, 문이 열리자마자 유입된 유독가스로 대부분의 승객들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불은 그 후 옮겨붙어 커져버린 것이다. 당시 지하철은 1500도가 넘을 정도의 초고열로 불에 타버렸고, 이 때문에 희생자의 대부분은 형체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새카맣게 그을린 중앙로역 벽에 시민들이 남긴 추모 메시지
새카맣게 그을린 중앙로역 벽에 시민들이 남긴 추모 메시지

 

당시는 휴대전화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은 시기였다. 지금처럼 버스 카드를 쓰는 게 아닌 종이로 된 열차표를 쓰던 시기였다. 당연히 탑승 시간 조회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가족의 생사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직장에 전화해 잘 출근을 했는지, 마지막으로 가족을 언제 봤는지, 지인들에게 연락해 혹시라도 놀러 가지는 않았는지. 내 가족이 지하철에 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당시 대구시장은 군부대를 동원해 열차를 치우고, 지하철역을 물청소해 사건 현장의 흔적을 모두 없애버렸다.

마지막으로 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현장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구시는 탑승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실종일 뿐 사망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사망자가 72명이라며 사건을 축소시키려 했다. 이런 대구시의 모습을 지켜본 실종자 가족들은 대구시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는커녕,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현장을 더 이상 훼손하지 못하도록 유가족 인간띠를 만들어 현장을 보존했다. 지하에 있던 하수구를 모두 손으로 직접 하나하나 뒤졌고, 당일 발생한 수 백 개의 쓰레기 포대를 모두 뒤졌다.

그 결과, 무려 140여 점의 유해를 직접 찾아냈다. 유가족들이 직접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찾지도 못하고 버려졌을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현장을 훼손한 대구시장은 물청소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발표하고, 유가족이 동의했다고 하는 등의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했다. 이러한 시장의 행태에 항의하는 유가족들을 당시 언론들은 폭도로 몰았다. 언론이 유가족들 폭도로 몰자, 시민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이때부터 ‘안타까운 유가족’이 아닌 ‘폭도’라는 누명과 주변의 시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다시는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하지 않게 하려는 유가족들

전국의 지하철 소재를 불에 타지 않는 불연성 소재로 변경

우리 사회가 사고의 원인을 분명하게 찾아야 하는 이유

 

방화범이 방화를 저질렀을 때 지하철 시트가 불이 잘 옮겨붙지 않는 난연성 소재였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방화 해프닝으로 끝났을 일이었으나, 당시의 지하철 시트는 불에 잘 타는 가연성 재질로 되어 있었다. 당시 기술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해외로는 난연성/불연성 소재의 열차를 만들어 수출까지 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후 유가족들이 참사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돈’의 문제로 저렴한 가연성 소재의 열차를 운행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사 출처 : 아시아 투데이
기사 출처 : 아시아 투데이

 

유가족이 포기하지 않고 싸워온 끝에 3년 만에 전국의 지하철 시트가 바뀌었다. 현재 볼 수 있는 알루미늄 시트와 난연성 플라스틱 시트, 난연성 모재 시트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재 발생 시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지하철역에 긴급구호함을 비치하게 됐다. 출입문도 수동으로 쉽게 열 수 있도록 바꿔냈으며, 탈출 안내판이 크게 제작되어 눈에 보이는 곳에 부착되었다. 역무원의 교육 과정도 강화되었다. 이 모든 것이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들이 포기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내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참사 당일 물청소를 지시해 현장을 훼손했던 당시 대구시장은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유가족이 물청소에 동의했다는 거짓말, 지하철공사가 결정해 물청소가 이루어졌다는 거짓말, 물청소를 한 적이 없다는 거짓말 등. 수차례 진술을 번복했음에도 결국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참사 현장을 고의적으로 은폐하려는 행위를 처벌하지 못하자, 이후의 사고에서도 현장을 훼손하는 일은 계속 발생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대구지하철이냐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해온 유가족들로 인해 전국의 지하철이 더 안전해졌지만, 유가족을 ‘폭도’로 몰아가는 일부 언론이 생긴 이후로 유가족에 대한 시선은 점점 나빠졌다.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저런다며 손가락질하고, 언제까지 슬퍼할 거냐며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이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무려 참사 발생 13년이 지난 2016년. 재단 설립에 성공했다. 유가족뿐만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안전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며 지은 재단의 이름은 「 2.18안전문화재단 」 이었다.

훼손된 추모시설은 마치 찢어져 버린 유가족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훼손된 추모시설은 마치 찢어져 버린 유가족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재단 설립으로 끝나는 일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대구시에는 대구지하철참사 추모시설이 공식적으로는 없다. 대구시는 시민들의 반대로 인해 ‘추모공원’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한다며 ‘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설립하겠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이름은 추모공원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추모공원의 역할을 하는 공간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아직까지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

추모비 역시 주민들의 반대로 인해 ‘대구지하철’이라는 표기가 없다. 그마저도 음식물을 투척하는 등 추모비에 훼손을 가하는 바람에 복구 과정에서 생긴 그라인더 자국이 남아있는 상태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2차 가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어렵사리 지켜낸 당시 불에 그을린 지하철과 몇 개 남은 벽을 통해 이 아픔을 기억해야 할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참사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렵게 지켜낸 열차 일부는 현재 하루 평균 450명이 찾는 안전 교육의 공간이 되었다
어렵게 지켜낸 열차 일부는 현재 하루 평균 450명이 찾는 안전 교육의 공간이 되었다

 

2.18재단과 4.16재단의 대화

 

 

4.16재단 : 저희 안산도 생명안전공원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2.18재단 : 예예. 안 그래도 그런.. 그래가 한 편으로는 우리가 세월호 유족들한테 미안하다는 거. 그런 측면이죠. 우리가 제대로 해놨다면은. 세월호는 그냥 자연스럽게 되었을 텐데. 제대로 못했으니까는 세월호도… 많이 힘든 거죠. 지금 그래 진척은 잘 되고 있습니까?

4.16재단 : 반대하시는 분들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꼬박꼬박 시청 앞에서 집회를 하시는 게 있어가지고…

2.18재단 : 그 집회하는 사람들은 몇 명쯤 합니까?

4.16재단 : 50명 정도.

2.18재단 : 한편으로 지금은 그 사람들이 그래 생각할 수 있지만은, 이거는 나도 유족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웃음) 미래에 가서는 그게 하나의 어떤… 관광지 같은.

4.16재단 : 랜드마크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2.18재단 : 네. 그런 형태로 이렇게. 그라고 또 가족들이 혐오시설이 되게끔 놔두겠어요?

4.16재단 : 기본적으로 가족들이 원하는 방식이. 웅장한 무슨 추모관, 추모탑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아요. 시민공원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고 원하는 사람만 지하로 가는. 그런 공간을 원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혐오시설은 아닐텐데 지금 원체 반대하는 분들께서 납골당 이렇게 말씀하시니…

 

 

4.16재단 : 중앙로역 추모시설은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나요?

2.18재단 : 저희들한테 문의를 하거나 이렇게 하면은 저희들이 나가서 설명을 하고 그런거죠. 중앙로 역의 기억 공간을 갔다가, 테마파크 체험을 하는. 그런 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4.16재단 : 체험하신 분들 평가가 되게 좋더라고요.

2.18재단 : (웃음) 중앙로 역에. 언뜻 지나가면서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 그 의의나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 아, 그랬었나. 미쳐 몰랐다. 그런 것도 많죠. 체험이 끝나면 같이 얘기를 들어봅니다. 소감을 여쭈면 거기서 하시는 얘기들이 저희한테는 상당히 위로가 많이 되는 그런 게 많더라고요. 본인도 이 사건 때 어디에 있었다, 지나가다가 봤는데. 이런 얘기부터 해가지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좀 외면하고 몰랐던 거. 이런 얘기들을 그날 서로 처음 뵀는데 서로 그런 과거의 일. 이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이 체험을 통해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다카는 것도 얘기하고. 이런 것들이.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들이 되게. 되게. 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돕는 유족 입장에서 참 힐링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모아가지고. 잘 보관을 해놓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저희가 만든 프로그램이지만, 좀 괜찮은 프로그램이다. 사람들 만나고, 체험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사주고 (웃음)

 

대구지하철 참사로 어머니를 잃은 2.18안전문화재단 사업팀장 황순오님
대구지하철 참사로 어머니를 잃은 2.18안전문화재단 사업팀장 황순오님

 

팽목항으로. 차 2대로 해가지고, 대표로 해가지고 갔었어요.

처음에 가가지고는 한… 한시간 이상을 계속 지켜보기 밖에 안했는 것 같아요.

왜냐면 심정을 아니까는…

– 예은 아빠 유경근 씨가 팽목항까지 왔던 전재영 씨에게 질문, 팟캐스트 세상끝의 사랑 15화 中

 

4.16재단 창립식에 참석하셨던 2.18안전문화재단 전재영 사무국장
4.16재단 창립식에 참석하셨던 2.18안전문화재단 전재영 사무국장

 

세월호 참사 당시 전재영 사무국장은 TV를 계속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대구지하철 참사로 아내와 딸을 한 번에 잃었기에 그 초조한 상황을 떠올리기가 괴로웠다. 혹시라도 유가족이 되어버리면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상상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구하기를 바라는 복잡한 심정으로 켜고 끄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저희가 한 번 가봐야 안합니까?”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던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은 서로에게 연락을 취했다.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이 모여 세월호 가족들이 모여있던 팽목항으로 떠났다.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이미 참사를 겪은 유가족으로서 그 애타는 심경을 겪어봤기에 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내려갔던 것이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 그 지옥의 현장을 보며 본인들의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겨우겨우 피해자 가족을 찾아 이야기를 건넸다.

 

TV에 나오고, 장관이 약속하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서명까지 받았는데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저희도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 출처 >

– 2.18안전문화재단. 2016. 2016활동백서

– 2.18안전문화재단. 2017. 2017활동백서

– 대구지하철참사 1주기 다큐멘터리 “Memories”. 오마이뉴스TV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15Cj1AIF-w

– 0313 끝나지 않은 이야기. 대구MBC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OzJAC-tDe7o

– 2.18 대구지하철 참사 16주기 추모식 영상, 2.18안전문화재단

링크 : https://blog.naver.com/218safety/221517366632

– 2.18안전문화재단 페이스북, 블로그

– 2.18대구지하철참사 – ‘기억’ 페이스북 페이지 영상

링크 : https://www.facebook.com/218daugu/videos/112339682817328

– CBS팟캐스트 ‘세상끝의 사랑’

링크 : http://www.podbbang.com/ch/15668?e=22557201

“살아서 용서를 구합니다” – 생존자 인터뷰, 한겨레21

링크 :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1489.html

– 재연될 뻔 했던 지하철 참사, 노컷뉴스

링크 : https://www.nocutnews.co.kr/news/4032445

– 2020′ 17주기 추모글, 리뷰어 처뤼님 포스팅

링크 : https://blog.naver.com/ews1016/221813175021

– 경북일보, 매일신문, 미디어오늘 등 언론보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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