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그날, 바다는 잔잔했어요... 분명히 모두 살 수 있었어요

언론 속 4·16재단
작성자
4・16재단
작성일
2024-01-16 10:06
조회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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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기사 내용

 

지난해 10월, 제주 서귀포에서 오용선님을 만났다. 오용선님은 화물기사로 일하던 2014년 세월호에 탑승했다가 세월호참사를 겪었다. 당시 함께 탄 제주의 화물기사들은 총 22명.

오용선님은 2014년 당시 제주도 화물기사 생존자 대책위원장을 맡았고, 지난 2020년 2월 발족한 '제주 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제생지)' 대표로 활동했다. 10주기를 앞둔 지금은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기억부터 앞으로의 꿈까지, 오용선님의 이야기를 전한다.

모니터 보니 노선 변경...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고 난 날 어땠냐고요? 잠을 자고 일어나면은, 배에 모니터가 있어요. 거기 GPS가 떠요. 이동 경로를 보여주니까 일어나면 늘 그걸 보거든요. 그(세월호참사) 전날 방송으로 '학생들이 많으니까 기사들은 밥을 좀 늦게 먹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날은 오전 7시 10분쯤 일어났어요. 밥 먹고 로비에서 모니터만 계속 보고 있었지.


그런데 노선이 변경된 거예요. 원래 섬이 있으면 돌아서 가야 하는데, 막 섬 사이로 가더라고. 노선 이탈이다 싶었어요. 모든 배에는 화물 기사들 방이 따로 있어요. 우리 방이 로비에서 한 70m 떨어졌나 그래요. 우리는 제일 후미라서 문을 3개 열고 들어와야 돼. 그걸 보고 방에 가는데 배가 넘어갔어요.

그날 아침에는 기사들이 로비에 네 명, 다섯 명 정도 있었어요. 배가 처음에 넘어갈 때는 보이는 사람 몇 명이 같이 탈출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다 막 헬기 타고, 막 이리로 저리로 막 탈출해서 나왔더라고. 난 끝까지 기다렸다가 구명보트 타고 탈출했고요. 배가 거의 뒤집어지기 직전에 우리 화물차 기사들 다 같이 나왔어요. 배가 어떻게 넘어갔는지는 몰랐지. 보니까 파도는 잔잔하고, 죽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거의 배 무너지기 직전에 해경 보트가 사람을 보고 왔더라고. 그렇게 기사 열 몇 명이 보트로 탈출했죠.

사실 그때,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죽은 줄 몰랐어요. 선장이 잘못했어. 모든 배에서는 선장 말에 다 따라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 때 '구명조끼 입고 가만히 있으세요' 하는 방송이 여러번 나왔거든. 문 가까이 있는 화물기사 동생한테, '야, 파도 어떠니?' 물어봤더니 '파도 잔잔하우다(잔잔합니다)' 하더라고. '아, 죽지는 않겠네.', '예, 형님. 우리는 뛰어내리면 되쿠다(뛰어내리면 됩니다).' 그랬지. 우리는 수영을 잘하니까.

우리는 또 배의 내부를 알잖아요. 어디 문 있고, 어디에 뭐 있고, 이런 거 다 아니까. 그런데 학생들은 아니잖아요. 속으로 '학생들이 뛰어내려야 하는데' 싶었죠. 뛰어내리면 구할 사람들 많이 있었고요. 한 시간 넘으니까 어선들이 어마어마하게 왔어요. 작은 창문으로 보니까 배가 보이더라고요. 뛰어내렸으면 어부들이 건져 줄 것 같아. 그런데 내부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까 학생들이 가만히 있었잖아요."


그날 이후로 화물 일을 그만두다

오용선님은 참사 이후 27년간 해 오던 화물 운송 일을 그만뒀다. 예전처럼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작은 회사에 다닌다. 여전히 차를 운행하지만, 예전처럼 육지를 오가거나 밤낮없이 일하지 않는다.

동시에 여전히 아픔을 감수하면서 배를 타고 화물차를 모는 생존자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오용선님은 참사의 순간을 잊기 위해 밖으로 나섰지만, 여전히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어려운 이들도 있다.

"제주도 화물기사 스물두 명이 세월호에 탔었어요. 서로 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한 27년 동안 화물차만 탔으니까. 나까지 넷이 27년 일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5년, 7년 된 사람들이었어요. 1989년부터 이 일을 했어요. 겨울 되면 밀감, 밀감시기가 끝나가면 무를 실어요. 제주서 짐 실으러 나가면, 육지 도착해서 배에서 내리면은 오전 10시에요. 들물(밀물)때는 배가 빠르고, 썰물 때는 배가 늦고 그래요.

사고 이후에 사실 이 오래된 화물차 일을 그만둬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좀 많이 했어요. 사고 난 후에 병원에 한 20일 입원하고 나와서, 퇴원하고 집에서 3개월쯤 있었어요. 이후에 운전이 가능할지 한번 해봤어요. 일을 다시 해보려고 했는데, 운전을 못 하겠더라고요. 밤에 운전하니까 좀 헛것도 보이는 것 같고. 주간에는 괜찮은데. 그래서 지금은 야간에 운전 안 해요.

나를 포함해 5명 말고는 지금 계속 화물차 하고 있어요. 배 타고 나가는 사람은 열두세 명, 여기서 그냥 조그만 화물차 하는 사람, 용달차 하는 사람 세 사람 있고요. 직장을 옮길 수가 없어요. 이걸 몇 년을 한 건데. 우리는 화물차가 우리 전 재산이잖아요. 재산이고 밥줄이에요. 일 안 하면 못 살아 먹고. 그냥 저는 가족 없고 저 혼자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 별로 상관 안 했는데, 일을 안 하면 살기 힘든 사람들이 많잖아요.

다들 괜찮지 않죠. 화상 입은 사람도 있고, 학생들 죽는 것도 보고 그랬는데... 자기네들이 옆에서 막 구해줘도 못 돌아온 사람들도 있고요. 제일 마지막으로 배가 빠지기 직전에 물이 구멍으로 나와서 그 물에 맞아서 팍 솟아오른 기사분도 있어요. 기사들도 사람마다 달라. 어떤 기사는 배 타면 막 울렁증이 있어서 힘들어하고, 학생들을 못 구해 죄책감을 느끼는 기사들도 있지. 그런 사람들은 술로 지내요. 그 기억이 떠오르면, 술 안 먹으면 안 되니까. 술 먹엉(먹어야) 잠을 자. 학생들 배에 막 골아앉을(가라앉을) 적에 못 살린 기억이, 기억이 계속 되살아난다고 그러더라고.

사고 난 후로 보험을 들려고 했는데, 정신과 약을 타 먹으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보험 든 게 아무것도 없어요. 2016년 1월까지 정신과 약을 먹었는데 약을 먹으면서 몸에 변화가 많이 생겼어요. 약이 독해요. 그래서 제주대학병원 선생님한테 가서 말을 다 하고 약을 끊었지.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의 화물기사가 손해배상소송을 해요. 곧 법원에 재판 들어갈 거예요. 아직 괴로운 사람들이 많으니까.

사실 그날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일하던 운수 사무실에 자주 갔어요. 비 오는 날 일을 못하니까 사람이 많거든요. 20명, 30명씩 사무실에 사람이 이신디(있는데), 조경하는 사람들, 화주들, 화물 기사들이랑 막 떠들고, 노래하고, 막걸리도 한 잔씩 먹고 그랬어요. 내가 시끄럽게 굴어도 사람들이 이해하더라고. 세월호에서 살아 나온 걸 아니까. 다들 '쟤가 고달프니까 놔둬라' 그러더라고. 아무도 나를 욕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이겨내려고 노력했어요.

지금도 힘든 사람들이 많아요. 평생 안고 가야 할 것 같아. 속마음을 털어라 해도 못 털어. 나는 막 돌아다니면서 많이 털었어요. 혼자 산에 가서 노래 부르고... 여섯 시간, 일곱 시간을 돌아다녔어요. 모르는 사람한테 '안녕하세요' 인사도 하고요. 사람 많이 이신데(있는데) 가면 떠들고, 사람 어신데(없는데) 가면 나 혼자 떠들고. 1년 동안 그랬어요. 그렇게 좀 이겨냈어요. 만약 내가 술이나 좋아했으면 술 많이 먹고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거야.

나처럼 속에 있는 말을 내뱉어야 하는데, 못 그러는 사람들이 많아요. 세월호참사 난 뒤에 그런 걸 많이 배웠어요. 말해야 나아진다는 걸. 정신과 의사선생님도 만나 보니 속에 있는 걸 털어내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우리나라는 트라우마 인정 잘 안해주는 것 같다"

속솜하라. '조용히 있으라'는 뜻의 제주어다. 부드러운 어감과는 달리 경고의 의미를 담은 말이기도 하다. 이 말에는 4.3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 자녀, 가족이 '빨갱이'로 몰릴까 학살의 기억을 마음속에 꽁꽁 싸매서 숨겨둔 채 살아야 했던 역사가 담긴 말이기도 하다.

아픔과 고통을 발화하며 나누는 것이 쉽지 않은 이들이 있다. 많은 생존자, 유가족들이 당연히 그러하리라. '속솜하라'는 말의 뜻을 온몸으로 새기고 있는, 제주에 남은 이들에게는 그것이 더 어려웠을 수도 있다.

"사고 난 당시에는 누가 나설 사람이 없더라고. 제주도 해 봐야 화물기사 22명인데. 그때 처음 사고 날 때는 제주시 1명 서귀포 1명 연락망을 만들었어요. 서귀포가 7명이고 나머지는 다 제주시예요. 그렇게 연락을 취하다가 나중에 내가 맡은 거지. 대표하는 한 사람이 없어선 안 되겠더라고. 여기까지 끌고 오긴 했지만, 사실 나도 많이 고달팠어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도 했지만, 사고 날 당시 나이가 쉰다섯이었어요. 전에 단체를 결성해보지 않아서 자세히 모르는데, 덜컥 맡았죠... 우리는 서울하고 떨어져 있으니까 처음부터 좀 소외감을 많이 받기도 했고요. 인천에 가도 설움 받고, 안산에 가도 설움 받고.

안산 온마음센터는 정부지원과 경기도 지원을 모두 받아 운영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주도청에 찾아가서 제주에 있는 화물 기사들 지원해달라고 해운항만청에 요청했어요. 공문 만들어서 복지부에 진정서도 여러 번 냈고요.

그래도 크게 달라진 게 없더라고요. (세월호참사 당시) 내가 타던 화물차가 회사 차였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개인 사업자로 운행하던 차였어. 그래서 나는 별다른 보상도 제대로 못 받았지 뭐. 법이란 게 사람 먹고살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당시 원희룡 제주도지사를 엄청 쫓아다녔어요. 면담하자고 하면 피하고... 겨우 면담을 한 번 하긴 해신디(했는데) 별다른 변화는 없어요.

병원에서 나는 48개월 정도 치료받을 수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듣기론 미국 9.11 테러 희생자들은 훨씬 보상기간이 길다고 하더라고요. 있잖아요. 우리나라는 트라우마라는 걸 잘 모르는 거 같아. 인정을 안 해줘요."


위로가 된 오름

"참사 이후 제주를 떠나고 싶은 적은 없었나"는 물음에 오용선님은 단번에 "한 번도 없었다"며 "어릴 때처럼 바다에서 뛰어놀 수는 없지만, 오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름의 탄생 설화를 떠올렸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만들기 위해 치마폭에 흙을 담아 옮기다가 흙들이 조금씩 흘러내렸고, 그게 오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작지만 일상의 곳곳에서 위로가 되는 존재들이 있는데, 오용선님에게는 그게 오름이었다.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제주도를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제주도는 앞으로 보면 바당(바다)이고 뒤로 보면 산이잖아요. 그리고 제주는 전부 다 오름으로 돼 있잖아요. 오름이 삼백육십 개가 넘어요. 2020년부터 마을에서 오름 동호회를 만들었어요.

지금은 일요일만 기다려요. 한 달에 두 번은 오름 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호회에서 날짜 잡으면 오름 무조건 가요. 제주 화물 기사들이랑도 한 달에 한 번씩 오름 갔어요. 혼자서라도 오름을 가든지 올레길에 가든지 해서 걸어요. 힘들어도 거길 가면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마음이 넓어져요. 


예전에 회사 그만두면 모아둔 돈으로 스위스로 여행 가려고 했어요. 거기서 벌어둔 돈 다 쓰고 오는 거야. 지금은 화물 일 그만두고 버는 돈이 적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방송에서 보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 사는 게 신기해요.

유럽, 미국도 갔다 오고 싶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요. 스위스 마테호른도 가고 싶고. 알프스 산에 올라가면 신라면 작은 게 그렇게 비싸대요. (웃음) 산티아고 순례길도 가고 싶어요. 다들 '아는 사람도 없는데 거기 가서 뭐 할 거냐'고 물어봐요. 뭐, 일주일 내내 혼자 걷는 거지."


세월호와 함께해 온 그의 10년은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화물차를 몰았던 동료들이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고, 제주의 오름과 산에 기대어 위로받았다. "세월호 기억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토로하던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며 설레어했다. 언젠가, 알프스 산에 오른 오용선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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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 장태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