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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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 진
10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정윤 진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애도, 이야기, 그리고… >
“엄마, 엄마! 3년 상이 뭐야?”
“응?”
“이이는 3년 동안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았답니다. 위인전에 이렇게 써 있는데, 왜 무섭게 무덤 옆에서 살아?”
“음…”
설거지를 하던 손을 멈추고 아이의 언어에 맞는 적절한 대답을 골랐다.
“그건…엄마가 보고 싶어서, 엄마 곁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기도하고 무덤이라도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우리 조상들은 떠난 엄마와 이별하는데 최소한 3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으…응…”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큰 소리로 울 수 없으니까, 무덤 옆에서 삼 년 동안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의례로 정해 두었을 거야.”
미적지근한 대답에 나름의 해석을 추가해서 이야기해 줬지만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선을 책으로 돌린다.
‘그래. 아직 10살인 너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독후감 숙제를 하던 아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불현듯 떠오른 기억을 물줄기에 흘려보냈다.
[세상에 사나이가 저리 울 수 있는지.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구천이의 통곡은 참나무 뒤에 숨은 두 사나이를 망연자실케 했다. 그들은 전율을 느꼈다.]박경리 <토지>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시절, 이 문장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별당 아씨를 잃은 구천이가 밤마다 산짐승들이 울부짖는 산골짜기에서 통곡하는 장면이었다. 누군가를 연모한 적도,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경험도 없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거나,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가정 형편이 18살이 경험한 슬픔이었다.
‘세상에 사나이가 저리 울 수 있는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른을 넘긴 후였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 유가족의 오열을 보고 나서야 심장이 찢어진다는 표현을 언제 사용하는지 알게 되었다. 사회 통념상 공개된 장소에서의 울음이 허용되기 어려운 성인들의 집단 슬픔은 낯선 동시에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촛불로 대응하는 무리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내가 가진 언어로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 때 몸이 먼저 움직이곤 했다. 촛불을 든 사람들 속에서 생면부지의 결연한 의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지난봄, 416 기억교실을 방문했다. 416 민주시민교육원에서 진행하는 교사 대상 연수 프로그램의 마지막 과정이었다.
2학년 1반부터 10반, 학생 및 교사 총 339명 탑승자 중 261명 사망. 우연히 들어간 교실, 책상 하나를 제외한 모든 자리에 올려진 꽃들을 보자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숫자로 인지하는 것과 감각으로 경험하는 일 사이에는 우주의 시작과 끝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다. 교실을 지나 교무실에 들어선 순간, 연수에 참여한 교사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명패가 있는 저 자리가 바로 내 자리였을 수도 있다. 철장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드는 것과 같다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이 생각났다. 죽음의 바깥에 있는 듯 잊고 살아온 시간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필연인 듯, 단원고 희생 학생들과 같은 나이의 초임교사가 연수에 함께했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누군가는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대학에 진학하고, 꿈을 이룬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 같은 시간을 지나온 304명의 유가족들이 떠올랐다. 떠난 아이의 물건을 껴안고 오열하고, 식사를 마다하고, 막말을 견뎌내고, 진상 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아이들이 자랐다면, 이 선생님처럼 어엿한 성인이 되었겠구나.’에 생각이 미치자 솜털이 일어서며 몸이 반응했다. 초임교사를 만나기 전까지 단원고 학생들의 20대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8년의 시간은 얼어붙거나 증발했고, 기억에서 왜곡되었다. 성장, 변화, 노화가 없이 마지막 모습 그대로 저장되었다.
기억하는 자아가 활성화된다. ‘1년 전 오늘’의 기록을 전달하는 SNS 알림처럼, 8년 전 오늘이 배달되었다.
2014년 4월, 돌 치레를 하는지, 둘째 아이는 동네병원에서 지역 종합병원 그리고 다시 더 큰 병원으로 옮겨가면서 폐렴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항생제를 쏟아부어도 열이 잡히지 않아 지친 와중에도 병원에서 첫 돌을 맞이하는 아이를 위해 케이크를 주문하고 풍선을 달았다. 입원 기간이 3주를 지나가자 혈관을 찾기 힘들어진 아이의 발목에 수액 바늘이 꽂혔다.
“바늘이 빠질 수 있으니 되도록 움직이지 마세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아이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햇살이 기우는 오후의 시간이었다. 채널을 돌리자 긴급 속보가 보도되고 있었다. 전원 구출이 오보라는 내용과 커다란 여객선이 거꾸로 뒤집힌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나운서의 말을 반복해서 듣고 난 뒤에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화면과 둘째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아이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가 도착했다. 촛불을 불고 아이를 돌봐주신 간호사분들과 나눠 먹었다. 동시에 휴대폰으로는 세월호 기사를 쫓고 있었다. 매년 4월, 둘째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사고 초를 켤 때마다 8년 전이 복기된다.
시간은 공정하지 않다. 어떤 아픔은 해결해 주면서 어떤 고통은 끝내 모른 척한다. 어떤 기억은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처럼 불현듯 선명하게 터져 나온다. 아무 일 없는 듯 살다가도 생일 케이크를 볼 때마다, 매년 봄이 되면, 아끼던 물건, 익숙한 향기, 함께 걷던 길,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때도. 기억 조각 속에 숨어 있던 그리움이 틈을 비집고 나온다. 마음속에서는 그리운 이와 함께 하지 못한 ‘만약에…그랬더라면’ 돌림노래가 무수히 재생되곤 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그 날의 수수께끼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잔존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위처럼 커다랗게 짓눌렸던 고통이 시간이 흐르며 작아지고 희미해질 뿐, 잊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작은 부싯돌이라도 닿으면 순식간에 불꽃으로 타올라 깊은 화상을 남긴다.
주검이 옆에 있고, 떠난 이를 위해 정성으로 장례를 치른 후에도 필요한 애도 시간이 3년이다. 자리조차 없는 죽음, 소중한 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죽음을 애도하는데 충분한 시간은 몇 년일까?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다.
슬픔은 통제해야 하는 감정일까. 시간이 흘러도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오고 울컥 눈물을 쏟게 하는 기억은 살면서 그만큼 힘든 일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감정은 한 번 크게 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두고두고 반복해서 토해내야 한다.
누군가는 쉽게 말한다.
“언제까지 이야기 할거예요?”
이름 붙이지 못하는 슬픔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다.
부를 수 없는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충분히 울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서사는 탄생한다. 세계관을 획득한 서사가 사람들에게 기억될 때 비로소 아이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