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성해나] 조각들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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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2024년 12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성해나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조각들>

 

차를 산 뒤 노란 리본 스티커를 뒷유리에 붙였다. 이후 세차를 하고, 눈과 비를 맞으며 끝이 떨어져 나가자 새 스티커를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떼어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난 몇 년간 그 사실을 잊고 지내다 세월호 10주기 기억식이 있던 지난봄 뒤늦게 인지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의 테두리는 점차 둥글어지고, 큰일에 태연해지고 너그러워졌으나 그 무던함이 기억과 애도에까지 적용될 때는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분노의 빈도는 드물어지고 슬픔에는 무뎌지고 기억은 흐려진다.

*

안산에서 오래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그곳과 멀지 않은 동네에 살고 있다.

안산천을 지날 때마다, 중앙역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숙연해졌던 적이 있다. 꽤 오래 그랬다. 대학 입시를 단원 고등학교에서 보았고, 스쿠터를 타고 상록수역에서 예대까지 등교할 때도 늘 그곳을 지나야 했으니 그 여진도 따라 길어졌다. 화랑유원지 버드나무에 푸른 잎이 움트고 기억 교실의 철거 소식이 들렸던 봄에는 공연히 죄스러워지기도 했다.

상실과 슬픔을 동반한 숙연함이 언제쯤 휘발되었는지,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일상으로 굳어진 게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다.

지난 십 년간 그 기억들은 깎이고 깎여 조각으로 남은 것 같다.

한때는 야쿠르트를 마실 때마다 슬퍼졌다. 야쿠르트 병에 새겨진 공장 주소가 ‘안산시 단원구’로 시작되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던 이곳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곳이 되어 있어서. 야쿠르트를 마시며 이곳에서 일하고 살림을 하고 빚을 갚고 아이를 키웠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것이 슬픔의 조각이라면, 분노의 조각도 있다.

광화문 민중 총궐기 행진에 다녀왔던 밤이 떠오른다. 경찰이 쳐놓은 바리케이트를 뚫기 위해 대치하며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되는 광경. 최루액을 맞아 생수로 얼굴을 씻는 사람들 틈에서 같이 분노하고 괴로워했던 광경. 자정 즈음 집으로 돌아가다 버스 정류장에 놓인 쓰레기봉투를 보았다. 봉투의 겉면엔 ‘우리도 살고 싶다’라고 적혀 있었다. 살아가고 있는데도 왜 살고 싶다고 부르짖는가. 눈의 통증이 가라앉고,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도 응어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 밤의 분노와 오래 품어온 슬픔이 이젠 전생처럼 희미하다.

지난 기억식 때 나는 곁에 있던 이들과 함께 기억하겠다고 외쳤다. 옆 사람이, 그리고 내가 되뇐 말을 들으며 깊이 통감했지만 한편으로는 열없어지기도 했다. 나는 과연 기억하고 있는가.

매일, 매시, 매분 그날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회복하면서도 다시금 고통을 느끼고, 웃다가도 불현 듯 부채감을 안고, 현재를 과거처럼, 과거를 현재처럼 살아갈 이들.

아픔의 척도를 재는 게 무용하다는 걸 잘 알지만, 간혹 망각 속에서 무수한 일상을 보냈다는 사실을 체감하면 부끄러워진다. 너무 많은 것을 흘려보냈구나. 미안해진다.

*

새 스티커를 사두고 붙이지 못했다. 무감히 고잔동을 지나기도 한다. 야쿠르트 병에 새겨진 제조사를 보고도 그저 넘겼던 날은 얼마나 많았을까.

일상의 뜨거움은 많이 식었고, 예리한 기억의 모서리도 깎였지만, 그럼에도 글을 쓸 때는 작게 흩어진 조각들이 천천히 그러모아진다.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기억이라는 단어를 줄곧 써왔다. 어제 혹은 오늘 쓴 문장에도 그 단어들이 갈피처럼 끼워져 있을 것이다.

흐르는 물결에 깎인 몽돌처럼 뭉툭하지만 그런 기억의 조각이 모이면 소리가 나고 소리는 단어가 되고 누군가는 그 글에 담긴 기억들을 소중히 듣는다. 나를 투과하여 정제되고 벼려진 누군가의 몸과 기억을 모두 그렇게 되뇔 것이다.

기억이란 언어가 기만으로 남지 않길 바라며 기록해본다. 매순간 담아 두지는 못해도 마음 깊이. 게으르지 않게.

 

 

성해나 (소설가)

2019년 중편 「오즈」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어디선가 나의 글을 읽을 당신을 떠올리며 쓰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2024년 제15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작품

『빛을 걷으면 빛』, 『두고 온 여름』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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