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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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2025년 6월 《월간 십육일》에서는 손원평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기억하는 마음>
나는 누워서 휴대폰으로 사건을 접했다. 안도했고, 조금 후엔 믿을 수 없었으며, 몇 분 후부터는 입을 가리고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돌이 막 지난 아기가 침대 옆 요람 안에서 쌔근쌔근 잠자고 있던 봄날 아침이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온 국민이 한 몸으로 느꼈던 충격과 슬픔은 강렬했다. ‘전국민 우울증’이란 단어까지 나올 정도로 그 일은 모두에게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그 당시 모두들 ‘세월이 빠르다’라는 말조차 쓰길 꺼릴 정도로 세월호라는 이름이 주는 아픔은 컸다. 실시간으로 뒤집히던 뉴스, 수학여행, 학생들, 손을 맞잡은 아이들, 도망간 선장, 돌아가서 아이들을 구하던 누군가,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하는 가족들,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아이들의 수를 등치시키던 누군가, 상상할 수 없는 조롱의 말들. 우리는 천사와 악마를, 현실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했다.
한자리에 모여서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따른 결과 따라온 침몰 앞에 사람들의 세계관은 뒤집힌 배처럼 한순간에 완전히 뒤바뀌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비통해했고 뉴스의 댓글에는 잊지 않겠다는 말이 수없이 달렸다. 허구보다 더한 비극 앞에 많은 작가들이 오랫동안 글쓰기를 멈췄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 중 세월호에 대한 나의 가장 선명한 기억은, 일이 일어나고 신촌역의 계단을 내려가던 어느 날의 한 장면이다. 누군가가 계단 한가운데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내밀었다. 세월호에 관한 전단이었지만 내용은 내가 상상한 것과 반대였다. 주변에서 몇몇 사람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자고, 언제까지 이 일에 매달려야 하느냐고. 내가 든 종이에도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아연실색해져 날짜를 세봤다. 고작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꽃이 떨어지고 연녹색 잎이 아직 짙은 초록으로 바뀌기 전, 오월이었다. 내가 그날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이제 지워내자는 말이 튀어나온 시점이 너무, 너무나도 일렀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11년의 시간을 겪으며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둔감해졌다.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연일 뉴스를 도배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까지도 예상할 수 있게 돼 버렸다. 그 어떤 소식을 접해도 이제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제 새삼스럽게 충격을 느끼는 일은 드물어졌다. 아니, 충격은 느끼지만 빠르게 잊는다. 세월호의 커다란 한방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비극은 빠르게 휘발된다. 아픔을 몸소 겪은 이들과 공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치부된다. 현명한 건 이런 거다. 적당한 시간 동안, 규격에 맞는 슬픔을 모두가 하는 양만큼 표현한 뒤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것. 비극과 슬픔을 소화하는 과정마저 획일화됐다. 우리는 조금 더 나쁜 방향으로 전진했다. 보다 쉽게 잊는다. 본 일을 보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넘긴다. 외면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남의 불행 앞에 웃음지을 수 있는 사악한 여유마저 생겼다.
세월호는 배의 이름이다. 이제는 사건의 이름에 가깝다. 세월호가 아이들을 싣고 가던 배였다는 것, 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나가던 배 위의 아이들이 꿈꾸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이는 갈수록 줄어든다. 세월 속에 사람들의 기억 속 세월호 역시 녹슬어 간다.
그렇지만, 아프더라도 어떤 풍경에 대해, 어떤 마음에 대해 기억할 수는 없을까. 즐거운 여행을 기대한 아이들, 서로 우정을 나눈 아이들, 내일에 대한 설렘을 품었을 아이들에 대해 우리가 처음 들었을 때 얼마만큼이나 진심으로 아파하고 화냈었는지. 그러니까, 나와 여러분이 지금보다 얼마나 말랑말랑하고 연약했는지. 몇 발짝쯤 덜 영리했을지 몰라도 인간에 대해 얼마나 진심으로 마음을 쓸 수 있는 존재였는지. 그때 우리가 함께 통과해낸 시간과 마음이 실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이제 세월호에는 너무나 많은 독과 녹이 묻었다. 그 안의 순수한 진실을 바라보기엔 모두의 눈이 흐려졌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때때로 되감아 보고 사라지지 않도록 새겨야 한다. 한때 잊지 않겠다고 모두가 한입으로 말했던 마음은 가끔씩 다시 복기될 필요가 있다. 내가 나였다는 것조차 망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기억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손원평 (소설가, 영화감독)
2001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영화평론가로 데뷔했으며, 2017년 제10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다수의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하기도 했다.
작품
소설 『아몬드』, 『서른의 반격』, 『프리즘』, 『위풍당당 여우 꼬리』, 『튜브』 등 / 영화 『침입자』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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