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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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선 화
8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오선화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거품이 조금 넘쳐도 괜찮잖아요 >
나는 자유로운 글쟁이다. 동시에 청소년들과 밥 먹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개인 활동가다. 먼저 손을 내미는 청소년들의 손을 잡다 보면 무엇보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아픔들이 이제야 문을 열고 쏟아지는 통에 더욱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의 직업이 글쟁이임에도 원고청탁이 올 때마다 볼멘소리를 한다.
“죄송해요. 정말 제가 시간이 너무 없어서요.”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지각의 이유를 ‘늦게 온 버스’에게 돌리는 변명처럼 궁색하게 들릴 것을 안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코 궁색하지 않은 사실이기에 이 말밖에는 드릴 말이 없다.
그러나 416 재단에서 온 청탁에는 그 말을 드릴 수 없었다. 청소년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416이라는 단어에 어찌 잠시라도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 청탁 메시지는 나를 곧장 2014년 4월 23일로 데려갔다.
그날의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수락하고, 노트북 전원을 켰다. 그런데 한 녀석에게 연락이 와 뛰어나가야 했다. 그리고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에서야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써야 할까. 그래, 하루 전인 4월 22일로 먼저 가야겠다.’
페이스북에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단원고 학부모 지원실에서 올린 공고였다.
<세월호 장례 봉사자 모집>
사망자로 확인된, 안산 친구들의 장례식에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우선 아래 전화로 연락하셔서 오전, 오후, 야간 중 봉사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말씀해주세요. 그럼 접수하시고, 병원을 지정해서 다시 연락을 주실 거예요. 병원은 안산의 병원 중에서 지정됩니다.
여기 접수 받으시는 분들도 많이 지쳐있으시니, 가능한 날짜와 시간과 인원만 말씀하시고 전화 끊고 기다려주세요. 혼자보다는 몇 명이라도 함께 신청하시면 좋습니다.
이 글을 바로 공유하고, 같이 갈 사람들을 모집했다. 나는 4월 23일 오전, 안산 고려대학교 병원으로 배정을 받았다. 병원에서 만나자는 글을 23일 오전 7시 30분에 올리고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9시 정도에 같은 조로 배정받은 이들을 만나 함께 장례식장으로 올라갔다.
장례 도우미를 도와 일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음료를 정리하거나 상에 비닐을 깔거나 하는 일들이 주어졌다. 우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어지는 일만 했다.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했을 뿐이다.
그렇게 적막한 장례식이 또 있을까. 유가족들은 영혼만 남은 것 같았고, 그 영혼조차 아무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런 분위기에 시답잖은 대화라는 걸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조차 폐가 될 것 같았다. 울 수도 없었다. 울고 싶었으나 그조차 사치 같았다. 그날은 그랬다. 온몸으로 견뎌내며 간신히 참아내는 가족들 앞에서 운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울 자격이라는 건 없겠지만, 그날 만은 있었다. 울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울지도 못하던 그날에 울 자격이 없는 우리가 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저 모두 조용히, 가능한 소리 내지 않고 움직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왜 상복을 입어? 누가 죽었다고 상복을 입어? 우리 애 돌아올 건데, 내가 왜… 왜 이걸 입어…”
한 어머니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몇몇 가족들이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하나 둘 흐느끼기 시작했고, 이내 흐느낌은 가슴을 쥐어뜯는 울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의 울음은 차라리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울기라도 해주어서 고마워요,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고 있는 어머니를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니 한 아버지가 굳은 얼굴로 친구가 건넨 조의금을 거절하고 있었다.
“나, 이거 안 받아. 이거 받으면 내가 너한테 다시 갚아야 하는데, 넌 이럴 일 없을 거니까. 절대 다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넌 이런 일 안 겪게 할 거니까. 나, 이거 안 받을 거야.”
한사코 조의금을 마다하는 그를 보며 봉투를 건네던 친구가 울었다.
이렇게 그날을 생각하면 한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에서부터 그들의 가족들, 지인들… 너무도 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들을 다 기록한다면 이번 호의 모든 지면을 다 할애해도 모자랄 것이다. 사실은 그날을 다시 세세하게 기억하는 게 두렵기도 하다. 밤새 울다 몇 자 적지 못할 것만 같다. 해서 가장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 하나만 더 기록하고자 한다.
나는 청소년들과 밥 먹는 사람이기에 청소년의 눈물을 말하고 싶다. 그날 본 청소년은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학생의 누나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냉장고로 다가와 사이다를 꺼내 제사용 주전자에 부으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례 도우미 아주머니가 넌지시 말했다.
“거기는 사이다 말고 술 넣는 건데?”
“아… 알아요. 그런데 제 동생은 아직 어려서 술 못 먹거든요.”
목소리는 떨렸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했다.
“아, 그러면 매실로 해.”
“사이다로 하면 안 될까요? 동생이 사이다를 참 좋아했거든요.”
“사이다는 거품이 넘쳐. 매실로 해.”
분명히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더는 대꾸하지 않고 매실을 받아 주전자에 따랐다. 그리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동생의 영정사진 앞으로 걸어갔다.
“거품이 조금 넘쳐도 괜찮잖아요.”
엿듣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말을 하지 못했을까. 어른의 말을 잘 들어서 동생이 떠난 줄 알면서도, 혹시 부모 욕 먹일까 공손한 모습을 보이며 떠나는 그 뒷모습이 안쓰러워 죽겠으면서도, 나는 왜 편을 들어주지 못했을까.
조용히 상을 차리며 엿보다가 망설이는 사이에 그 상황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게 내내 미안했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미안함이 짙다.
청소년을 만나다 보니 그들의 보호자를 만날 일도 잦다. 보호자들은 그 도우미 아주머니와 같은 말을 많이 한다.
“이 학원은 꼭 가야 해요. 그래야 대학이라도 가죠.”
“아이는 그걸 원하지만 이게 더 나아요. 그건 너무 후져서 안 돼요.”
“아이가 잘 몰라서 그래요. 이게 더 맞아요.”
이 말들은 모두 “사이다는 거품이 넘쳐서 안 돼. 매실로 해.”라는 말과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거품이 조금 넘쳐도 괜찮잖아요. 아이가 사이다를 좋아한다고요.”
그 학원을 가도 대학을 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 더 폼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가 더욱 잘 알 수도 있다. 매실이 더 좋다는 건 어른의 편견이고,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거품이 나지 않는 매실도 쏟을 수 있고, 제아무리 매실음료라도 흔들면 거품이 날 수 있다. 어른 말을 잘 들어 잘 될 수도 있지만, 그날의 아이들은 어른 말을 잘 들어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2014년 4월 23일, 장례 봉사가 끝나갈 즈음 슬픔이 복받쳐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너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미안해… 너만 없으면 행복하겠다고 했던 것도 미안해… 그냥 싸우고 화나서 한 말이야… 네가 이렇게 진짜 사라질 줄 알았다면 안 했을 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동생의 영정사진 앞에서 주저앉은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울 자격도 없는 내가 울어버렸다. 거품이 나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나는 괜찮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거품을 탓하는 어른들을 보며 아이들은 괜찮지 않다. 거품이 넘치면 닦으면 그만인데 말이다.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