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오시은] 광장의 불빛이 희망이다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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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은


2025년 1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오시은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광장의 불빛이 희망이다>

 

4월을 앞둔 어느 날, 진도 팽목항에서 여객선을 탔다. 제주도로 가는 배였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뒤로는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배를 타지 않을 생각이었다. 10년 전 그날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그 아침의 일을 모른 채 평화로웠을 희생자들의 모습과, 목소리와,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선연할 것도 같았다.
그런데 막상 배를 타니 염려했던 공포가 조금씩 희미해졌다. 출렁이는 파도는 부드러웠고, 바람은 상쾌했다. 여행객들의 흥겨운 소란은 내 감정을 이리저리 흐트러뜨렸다. 그 덕에 나는 제주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할 즈음엔 어느 정도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기 위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른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감정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가팔랐다.
내가 내린 곳은 그들이 무사히 당도 했어야 할 땅이었다. 나는 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가 이내 허둥댔다. 동행이 있었지만 내 상태를 전하지는 못했다. 한숨만 입 밖으로 나왔고 속으로만 되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잊으라는 거야?’
그리고 그만 잊으라고 하는 이들에게 소리 내어 묻고 싶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는데요?”

매번 팽목항을 갈 때도 그랬다. 목포에서 팽목항으로 가기 위해 진도대교를 넘어설 때면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혼자일 때도 그랬고, 여럿일 때도 그랬다. 다리 아래 울돌목의 우르릉대는 파도소리가 귓전에 환청처럼 울렸고, 그게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팽목항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처음으로 오른 뭍이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많은 이들이 팽목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기억문화제를 열고, 팽목바람길을 만들어 도보 순례를 이어 왔다.
이름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봤다. 이름에는 무언가를 상징하고 고유하게 만드는 특성이 담기기 마련이었다. 팽목항도 그랬다. 하지만 팽목항은 이제 진도항으로 불리고 있다. 팽목항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그들은 팽목항이라고 부르지 않아야 미래가 있다고 한다. 참으로 바보 같은 말이다. 과거를 묻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건 이미 수많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서글픈 건 바보 같은 말이 종종 사람들에게 통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잘못된 역사는 자꾸 반복된다. 그러니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 잊으려 한다는 건 말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팽목항처럼.

10년 전 그때, 나는, 우리는 광장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무능하고 타락한 정권이 물러나면 조금이라도 안전한 세상이 될 거라 믿었다.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도 컸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울먹이며 부른 것도 그래서였다. 그렇게 외치고 바라면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2022년 10월 29일 용산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죽고, 195명이 다치는 일이 생겼다. 잘못은 반복되고 있었다. 참담함 속에서도 우리는 무엇이 잘못인지 정확히 알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고, 벌 받아야 할 사람을 마땅히 벌하지 못했으며, 책임자는 자기 할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 그것이 잘못이었다. 2014년 이후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아까운 목숨에 대한 비통함으로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면서도, 다시는 광장에 서거나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없기를 바랐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그 밤과, 2024년 12월 29일 그 아침을 맞아야 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한밤중에 벼락같은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 때문에 국민들의 삶은 안전하지 못했다. 많은 시민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계엄령 선포는 2시간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무안국제공항에서 제주항공 7C2216 편 여객기가 비상 착륙하면서 17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었다. 우리의 안전은 언제나 위협받고 있었다. 우리는 안전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나는 다시 광장에 섰다.
흔들리는 배 위에 앉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열심히 걸어 왔는데도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 화도 났다. 어디선가 희망을 품지 말라고 비웃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광장의 불빛을 보는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색색으로 빛나는 광장의 불빛은 등대처럼 길잡이가 되고 있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고 넓게 보면 알 수 있는 희망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빛들은 한 목소리이면서도 다른 목소리였다. 그 빛들이 당당하게 외쳤다.

‘할 테면 해 봐. 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아롱다롱 색색으로 빛나고 말 테니까. 그렇게 지킬 것은 지키고야 말 테니까.’

부당함에 굴하지 않겠다는 희망과 의지의 목소리였다. 그토록 다양한 빛들이 지금껏 침몰하는 세상을 건져 올린 거였다. 이거 아니면 저거,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하는 것은 이미 낡은 가치관이라고, 불빛들은 외치고 있었다. 그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가 내가, 우리가 겪은 낭패감을 극복할 거라는 희망과 믿음이 보였다.

그러니 이제 물러날 것은 물러나고, 나아갈 것은 나아가면 좋겠다. 지나온 것을 가슴에 새기되 다시는 제 자리로 돌아오지 말고, 그저 거침없이 힘 있게 나아가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오시은 (어린이청소년책 작가)

동화와 청소년소설과 그림책 글을 쓰고 있다. 416단원고 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 발간위원으로 함께 했다.

작품

『용용의 학교 점령기』, 『곤을동이 있어요』, 『천삼이의 환생 작전』, 『안녕, 나의 우주』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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