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현호정] 빛과 무한

월간 십육일​

x

현호정


2025년 7월 《월간 십육일》에서는 현호정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빛과 무한>

 

무한無限을 믿어야 한다고 교사가 말했다. 무한의 존재를 우리가, 용납해야 한다고.

0.9999999999999999999…

수학 시간이었고 무한 소수를 배우고 있었다. 소수점 뒤의 9가 끝없이 이어진다면 이는 1과 같다는 단순한 명제였다. 교실은 늘 그렇듯 차분한 채로 들썩거렸다. 여기저기서 뼈마디 자라나는 소리가 샤프심 부러지는 소리에 섞여들었다. 교사는 ‘1과 같다’는 말을 ‘1이 될 수 있다’고도 표현했다. 묘한 격려가 느껴져 그랬을까. 머릿속에 줄 서있던 9들이 마음을 향해 움직였다.

무한을 믿으라고? 나는 벌써부터 믿고 있었다. 별로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무한이라는 개념은 자꾸 손에 잡히려 했다. 나는 무한을 알 것 같았고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아예 하나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무한은 진정한 무한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까 내 믿음의 방식이 문제였다. 수학적 사고에 적용되질 않았다. 평생에 걸쳐, 당연히 지금도, 나는 무언가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아니었다. 본 뒤에 비로소 믿는 자도 못 되었다. 나는 일단 믿고 나면, 그것을 봤다고 여기는 쪽이었다. 그게 내 곁에 있다고, 내내 여기 있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라 그랬을까. 꾀를 하나 냈다. ‘무한의 있음’을 믿는 대신 ‘끝의 없음’을 믿는 거였다. 무한에 대해서는 아주 잊어버리고, 소수점 뒤의 9들에게 끝이 없다는 생각만 남길 것. ‘하지만 끝은 있잖아.’ 이제 문제는 이거였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졸업 후에도 나는 가끔 그 수학 시간 생각을 했다. 마음 속에 소중히 여기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해가 바뀌어 몇 주기인가의 셈을 할 때면 반드시 그랬다. 그 수업에서 나는 ‘무한의 있음’과 ‘끝의 없음’을 공부했지만, 삶은 내게 언제나 ‘무한의 없음’과 ‘끝의 있음’만 보여 줄 뿐이었으니까.

부고를 들으면, 처음엔 끝나지 않는 순간이 시작된 것 같았다. 고장난 센서등처럼 한 번 켜진 슬픔의 빛이 아무리 기다려도 꺼지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환하기만 했다. 한 순간은 여러 시절을 삼키고 소화하지 못했다. 연월일이 턱턱 얹혀 뒤죽박죽 부푼 그 순간이 도무지 떠나가질 않았다. 아니! 떠나갔다. 나를 떠난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하여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새 내 가슴 속에는 오로지 내 자신의 시답지 않은 절망과 지겨운 우울만이 어둠을 배경으로 초라하게 어른거릴 뿐이었다.

하루는 위태로운 심정으로 옥상에 올라섰다. 초여름 초저녁 아직 말간 하늘 아래 개미같은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어둠이 앉기 시작하자 가로등이 점등되었다. 한 번에 다 켜지는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 차례차례…… 도미노가 넘어가듯 불이 켜졌다. 작은 골목이며 도로를 따라 주욱 이어지는 빛의 행렬은 건물 곳곳에 닿았다. 궤적이 한 아파트에 이르자 그 빛을 옮겨받듯 혹은 그 빛에 빛으로 화답하듯 층계참의 센서등이 맨 아래층에서 위층까지 차례로 밝혀졌다. 탄성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러는 중에도 부단히 쏟아지는 금귤처럼 멀리까지 굴러가는 빛의 방울들. 조그만 게 눈물나게 귀하여 절로 송구스러웠다. 눈 닿는 곳의 모든 불이 다 켜진 뒤에도 차마 내려가지 못하고 깊은 밤이 될 때까지 세상을 바라보았다.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발걸음마다 깜박이는 센서등이 멀리 선 등대처럼 반짝거렸다.

그런 일들이 지금 왜 다시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촛불을 든 사람들, 말 못하게 아깝고 눈물나게 귀하던 조그만 이들, 숫자가 적힌 팜플렛 등에 내내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너무 오랜만에 교실이란 공간에 들어와 책걸상에 앉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칠판 위 ‘다시’라는 단어에 눈이 멈췄다. ‘우리 꼭 다시 만나자’, ‘다시 태어나도’, ‘다시는 너처럼 좋은’, ‘다시’, 다시… 다시 무한이 떠올랐다. 그러나 낯선 조우. 무한이 끝을 품에 안고 있었다. 거기에는 끝도 있고 무한도 있었다. 끝이 있어서 무한이 있었다. 끝나고 다시 시작해 계속되는 걸음. 유한의 반복이었다. 영원이었다.

그러니까 무한을 가진 소수의 소수점 뒤에 놓인 9들은 규칙적으로 늘어서는 똑같은 9가 아니었다. 9들은 서로를 몰랐고 불완전했다.

불빛처럼 켜지고 꺼지며 이어지는 9
민들레처럼 피고 지며 계속되는 9
이름처럼 기억되며 불리우는 9
물방울처럼 모양을 바꿔 돌아오는 9
그러나 그들이 모인다면. 구들이 모여 일이 된다면. 하나 된 후에도 계속한다면.

0.999…=1

수업종 소리가 들린 듯해 문득 사방을 둘러보았다. 창가의 햇빛이 눈썹에 얼쩡거렸다. 여기저기서 서로 다른 훌쩍임들이 들렸다. 불규칙적으로 나아가지만 순환이었다. 여럿의 발걸음으로 발산될 공간의 수렴이었다. 이 교실의 이상한 무한을 믿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무한이 있음을 우리가, 용납해야 한다고. 유약한 우리의 사랑과 그리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실 이곳저곳에서 이번에는 침묵이 꼬리를 물었다. 서로서로 마주치는 낯선 눈동자 속에 하나의 사건이 무한히 반사되었다. 너희 없는 너희 교실에 슬픔의 빛이 어룽거렸다.

 

현호정 (소설가)

2020년 『단명소녀 투쟁기』로 제1회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했다. 거북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으며,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쓴다. 공연예술창작단체 ‘안티무민클럽AMC’의 일원이기도 하다.

작품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 『삼색도』, 『한 방울의 내가』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https://416foundation.org/%ec%98%a8%eb%9d%bc%ec%9d%b8-%ea%b8%b0%ec%96%b5-%ea%b3%b5%ea%b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