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규명,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한 일
<‘재난 현장 속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 임종한 님
안녕하세요. 직업환경의학을 전공하는 임종한 교수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8.31사회적가치연대에서 재난 현장을 지키는 사람으로 저를 추천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고엽제 피해자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만나며, 환경 피해에 관한 연구를 해왔습니다. 특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이 시대적으로 큰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실감했습니다. 의사로서, 연구자로서 피해자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가습기 살균제의 2세 피해를 알리고 싶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마을 주치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가정의학을 전공했습니다. 전임의를 마친 후, 지도교수님께 “우리 사회도 마을 주치의를 도입할 때가 되었으니, 우리 대학에서 특정 지역을 선정하여 시범적으로 주치의 사업을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지도 교수님은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시행하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종합병원에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인사를 드리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1990년대 초, 저는 그렇게 인천의 한 달동네에서 마을 주치의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주치의로 있었던 동네는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달동네였고, 작은 의원 하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남성들은 산업재해를 당했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노동 능력을 잃거나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를 입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혼했어도 부인이 도망가거나, 자녀를 가지지 못하거나, 지체 장애 등 장애가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걸음걸이가 불편한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리가 짝짝이거나 한쪽 근육이 말라버린 분들도 있었고, 피부질환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분들의 증상이 그동안 교과서나 임상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새로운 질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분들에게, “혹시 외국에 다녀온 적이 있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랬더니 “제주도도 안 가봤다. 다만, 월남전 참전을 위해 베트남에 간 적이 있다”는 대답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물어보니, 모두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증상들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았고, 고엽제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엽제는 197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한 화학무기입니다. 여러 제초제를 혼합한 화학물질인데 사람과 환경에 매우 위험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고엽제에는 다이옥신이라는 발암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고엽제에 노출된 군인들과 베트남 주민들은 암, 피부질환, 신경계 질환 등의 만성적인 건강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고엽제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월남전 참전의 명분이 흐려질까 봐 언론을 몇 년간 통제해 왔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고엽제 피해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구 논문을 찾다가 미국의 젠킨스 박사(Dr. Michael Jenkins)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는 고엽제의 주요 독성물질인 다이옥신이 인간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습니다.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한국에도 고엽제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쪽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답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젠킨스 박사가 연구 보고서를 이메일로 보내주셨고, 저는 이를 번역하여 고엽제 피해를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이 오늘날 고엽제 후유증 관련 법률 제정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가 많다는 것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더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 환경의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인하대학교에 산업의학과(현재 직업환경의학과)가 신설되었고, 대학에서 초빙받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마을 주치의가 되고 싶었지만, 교수님께서는 “환경성 질환 피해가 많은데, 이를 알릴 수 있는 전문가가 있어야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며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그 말에 이끌려 저는 결국 마을에서 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는 1990년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가정, 공공장소, 병원 등에서 널리 사용했습니다. 살균제는 가습기에서 발생하는 세균을 죽이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지만, 제조사들은 제품에 포함된 유해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은폐한 채 판매했습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수천 명이 넘고 사망자도 있었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은 폐질환이나 호흡기 질환을 앓았는데 아이들도 많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2011년 당시 정부는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았고, 환경부와 보건복지부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만 했습니다. 그때 한국환경보건학회에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조사하자는 결정을 했습니다. 저도 한국환경보건학회 회원이었고 가습기 피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과천에 있는 피해 가족을 만나러 갔을 때, 식사 중 시어머니가 갑자기 “내가 예쁜 손자와 손주가 있었는데, 며느리가 아이들을 다 말아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잃었고, 그 순간 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한 사람의 피해로 끝나지 않고 결국 가정과 그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잃은 가족도 있었고, 가정이 깨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저는 직접 피해 조사를 하면서, 진실을 꼭 밝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016년, 제가 환경독성보건학회 회장이 되면서 가습기 피해를 규명할 수 있는 학술 연구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학회장이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인정하지 않던 부분에 관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된 피해를 인정받게 하도록, 저는 2016년, 2017년, 2018년에 가습기 살균제 인정 범위 확대를 위한 연구를 책임연구자로 세 차례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HDLI(폐에 특정한 병변이 나타나는 질병)뿐만 아니라 천식, 폐렴, 간질성폐렴 등 기존에 인정되지 않았던 다른 피해들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2018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규명 연구로 환경부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습니다. 피해가 알려진 지 7년 만의 일이었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의 학술적인 기초를 마련했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피해 규명이 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폐암까지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인정받았습니다. 저는 여러 과학적 증거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연구를 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를 폐로 흡입하면, 폐에서 말단으로 혈액을 통해 전신에 퍼지게 됩니다. 그 결과, 간, 골수, 근조직 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폐 세포가 손상되고 섬유화되는 현상은 다른 조직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흡입할 때 피부나 코점막을 통해서도 흡입되며, 폐뿐만 아니라 심지어 뇌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만성피로증후군,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 발달장애 등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신체 여러 부위에 피해를 미치는 전신질환이라고 의견이며, 현재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어 이미 진실이 규명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 피해가 2세까지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1세 피해자가 주로 성인이라면, 2세 피해자는 부모가 사용했던 가습기 살균제 유해 물질에 노출된 어린이나 태아를 말합니다. 어릴 때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되면 세포가 손상됩니다. 세포에는 핵과 미토콘드리아가 존재합니다.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된 PHMG라는 화학물질은 세포막을 훼손하고, 세포 사멸을 유도하며, 이에 따라 섬유화가 촉진됩니다. 또한, 미토콘드리아도 손상될 수 있는데 이는 암 발생과 섬유화 등의 여러 질환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포에 변화가 생기고 세포막이 깨지면, 그 결과 암, 천식, 폐렴 또는 면역 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노출된 경우,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에 손상이 발생하는데, 미토콘드리아는 에너지를 생성하는 기관입니다. 미토콘드리아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에너지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아이들이 특징적으로 기력이 부족하고, 집중력도 떨어지며, 산만해지게 됩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행동에 이상이 나타나는 것은 에너지 공장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 이상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 공장에서 활성산소라는 독성물질이 많이 생성되면, 이 물질이 DNA를 훼손하게 됩니다.
DNA에는 텔로미어라는 구조물이 있는데, DNA가 손상되면 이 구조물은 점차 짧아집니다. 연구에 따르면,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면 노화가 진행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아이들은 그 나이에 비해 텔로미어가 훨씬 짧아지며, 운동 능력도 떨어지고 피로감이 더욱 심해집니다. 텔로미어의 짧아지면 실제로 수명이 단축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기대 수명이 90세라면, 텔로미어가 짧아질 경우 수명이 10~20년 정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자 중에는 학습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피로로 인해 오후 수업을 듣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면 쉽게 지치고 탈진 상태가 됩니다. 조금만 운동해도 다음 날 일어나기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일지라도,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체력이 부족해 군대에서 뛰는 것이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군대에 가면 갑자기 무리한 운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신체 무리로 사고가 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 노출로 인해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규명하여, 이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정부는 주목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들의 평생을 책임져야 하므로 보상액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상황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제대로 규명하는 일은 피해자를 넘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먼저 만성 질환과 생활상의 어려움을 밝히는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만성 피로 증후군이 보고되었지만,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감염성 질환이 사망의 주원인이었지만 지금은 암, 뇌혈관 질환, 당뇨와 같은 만성 질환이 주된 사망 원인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만성 질환은 세포 손상과 염증 반응이 누적되어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규명하는 것은 암, 뇌혈관 질환, 당뇨와 같은 질환의 발생을 줄이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안전성에 관한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가습기 살균제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사회가 제대로 인정하고 과학적 근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피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전문가가 없다면, 피해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증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무슨 근거로 피해를 주장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피해자들은 자신감을 잃고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경험을 과학적 증거로 남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저는 피해자들에게 계속 글을 쓰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들의 경험과 증거를 기록으로 남기면,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전문가들이 맡을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할 부분은 규명하면서 피해자들이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피해자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기록으로 남기면, 후에 이와 관련된 증거를 뒷받침할 수 있게 됩니다.
화학물질 안전과 기업의 책임을 묻는 중요한 근거가 될 이 사건은 전 세계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이 연구로 환경 정의를 새롭게 세울 수 있고, 기업이 책임을 다하며 시민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어야만, 다음 세대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도 가습기 피해 가족분들의 활동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저는 최근에 ‘통합 돌봄’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는 환경 안전과 보건에 관한 법적 체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안전하고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저는 환경보건 안전과 돌봄을 연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여전히 마을 주치의가 되길 원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적절한 돌봄을 받으면 중증 질환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의료비 상승과 건강보험 파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 통합 돌봄을 통해 취약계층의 건강과 복지를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체계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런 체계를 만들어 가는데 제가 해온 연구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주관 – 4·16재단 / 협력 –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 후원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 글 – 홍세미 (인권기록센터 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