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피해자의 권리와 곁을 상상하며”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어려워요. 우리가 지금 다른 참사까지 살필 상황이 되는 건가? 우리도 해결된 게 없는데.”

재난피해자권리센터의 설립을 준비하며 세월호참사 희생자인 상준이 엄마 강지은 님이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2022년 9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만들어졌던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사참위는 8년 동안 9개의 국가기구에 걸친 진상규명 조사의 끄트머리에 선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참사의 원인은 여전히 안개 속에 놓여 있었고, 어렵게 법정에 세운 책임자들에겐 연이어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2024년 개관을 목표로 삼았던 생명안전공원은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황입니다. 세월호참사 피해 가족들은 길을 잃은 듯 보였습니다. 적잖은 시간 인권운동을 해왔던 나 역시 이런 막막함과 허무함은 처음이라 잘 삼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의 손을 붙잡고, 재난 참사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른 재난피해자들과 시민들을 모으고 함께 행동하기 위한 둥지를 만드는 데 앞장서 달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한 듯 보였습니다.

2022년 10월 159명을 참담하게 놓쳐버린 10.29이태원 참사는 ‘우리가 이렇게 외친다고 세상이 안전해지긴 하는 걸까? 변하기는 하는걸까?’라는 깊은 좌절과 비통함을 안겼습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생명, 안전사회를 위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곧추세워야 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절감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가족들과 활동가들이 다시 다잡았습니다.

 

우리처럼 오래, 우리만큼 깊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2022년부터 2년간 4·16재단 활동가들과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전국을 돌며 다양한 재난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과거로 되돌릴 순 없지만 미래를 바꾸기 위해 재난피해자들의 연대체를 만들어 하나의 목소리를내고, 재난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연결하며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재난피해자권리
센터’를 만들자고도 설득했습니다. 모든 재난피해자의 권리 옹호는 2018년 설립된 4·16재단의 주요한 소명 중 하나였으며, 누구보다 오래싸워왔던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누구보다 재난피해자 권리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감해왔기때문입니다.

만남과 설득, 아픔과 진심이 닿아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참사, 인천인현동 화재참사,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가습기살균제참사, 7.18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참사, 4.16세월호 참사,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참사 등 8개 재난피해자들이 우리가 겪은 참사를 다시는 아무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혹여라도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처럼 오래, 우리만큼 깊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2023년 12월 16일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발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0여 일이지난 2024년 1월 31일 재난피해자들의 권리증진을 수임 사항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민간단체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우리함께’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피해자의 주체화와 피해자 권리를 꿈꾸며

지난 1년 센터는 참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우선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지원해왔으며, 사각지대에 놓인 재난피해자들을 발굴하고, 피해자들의 권리 옹호 활동과 피해자들이 스스로 모임을 결성할 수 있도록 조력해왔습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의 의학적 원인 규명, 오송지하차도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및 아카이빙 지원, 아리셀 중대재해참사에 대한 심리회복 지원 등은 올 한해 416긴급지원을 통해 재난피해자들이 주체적으로 권리 옹호 활동을 하고,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한 대표적인 활동입니다. 416긴급콜로 연
결된 광주학동참사와 부천화재참사에 대한 긴급 실태조사 및 시민사회와의 간담회 개최 등 역시 재난피해자의 곁으로서의 센터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재난피해자들이 생명안전공동체 강사로 비상할 수 있도록 참여형 강의를 기획·운영하고, 공개강의 신청을 통해 재난피해자들이 어엿한 강사로서 시민들과 만날 기회를 제공한 것도 올해 센터가 한 자부심 가득한 활동입니다. 재난을 겪은 피해자·조력자·법률가·심리상담사·언론인·이주민·공무원이 참고할 수 있는 재난피해자 권리 안내서를 발간하고 관련한 공개교육을 지원한 것도 주요한 성과입니다. 그 과정에서 재난피해자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제언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재난피해자의 알 권리, 참여권, 국제인권법에서의 재난피해자의 권리를 톺아보는 연구를 수행했고 이 내용을 국회에서 피해자와 전문가들이 만나 함께 다루는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신진연구자들을 모아 지난 10개월간 함께 공부하고 연마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정책포럼을 개최해 신진연구자들이 사회적 참사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활동도 쌓아왔습니다.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도 놓지 않고 기획, 운영해왔습니다. 센터 공간을 전시관으로 만들어 분기별로 다양한 전시를 추진하고 관련한 대중 강의를 열어 시민들도 문턱 없이 센터에 드나들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올해 가장 주목받은 전시와 강의 중 하나는 청강대에서 진행한 <애도와 서사>라는 수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재난피해자들이 강의하고 학생들이 그로부터 받은 영감에 기반해 웹툰, 만화 등의 작품을 생산하는 수업을 청강대와 함께 기획해 올 상반기에 개설했는데, 좋은 작품들이 쏟아지면서 관련 작품들이 센터는 물론 수원, 광주 등에서 순회 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수업을 찍은 다큐멘터리는 올해 인천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청소년과 청년 재난피해자 13명을 인터뷰해 제작한 웹툰 <청소년과 청년, 재난을 살아내다>는 널리 회자되며 그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4 레드 어워드 주목할만한 기록에 선정되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국내 재난피해자들과 함께 그렌펠 타워 화재 참사, 더비쇼호 침몰참사, 힐즈버러 압사 참사 등 다양한 재난피해자들을 만나고 온 해외연수, 청년들이 직접 재난 보도 준칙과 재난피해자의 권리를 기준으로 재난 보도를 모니터링하고 분석한 모니터링단 운영, 재난에 대한 사진 아카이빙, 메타버스 운영… 채 열거하지 못한 사업들까지, 그 어느 하나 공들이지 않고, 숨결이 깃들지 않은 활동이 없었습니다.

 

비틀거리겠지만 나아가며

물론 늘 애쓴 것만큼 순탄한 것은 아니어서 지난 1년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넘어서고 일어나기를 반복 중입니다. 소처럼 일한 덕분에 센터가 빠른 시간 내에 안정화되고 체계화될 수 있었지만 그만 큼 활동가들의 야근이 반복됐습니다. 칭찬만큼 쓴소리와 질책도 있었습니다. 일꾼은 적건만, 할 일은 많고, 기대는 무겁습니다. 고단한 여정에 종종 비틀거리겠지만 그럼에도 센터는 조금씩 나아갈 것입니다. 헌신하는 활동가들과 기꺼이 곁이 되어주는 재난피해자들, 그리고 동행하고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 4·16재단 연차보고서에 담은 기획 글입니다.

https://416foundation.org/%ec%98%a8%eb%9d%bc%ec%9d%b8-%ea%b8%b0%ec%96%b5-%ea%b3%b5%ea%b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