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김겨울] 그의 푸른 코스터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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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울


이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운영하며

MBC 표준 fm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의 DJ이신, 김겨울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그의 푸른 코스터>

 

나는 그가 만든 코스터를 차마 못 써서 몇 달 동안이나 부엌 찬장 한 쪽,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곳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양말목을 꿰어 만든 코스터는 튼튼한 촉감과는 달리 왠지 불안해보였다. 한창 양말목공예에 빠져있는 친구가 만든 커다란 크기의 담요 비슷한 것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고양이의 모습을 영상으로 전해받은 뒤였다. 고양이를 기르는 집도 아닌데 차마 내가 쓰다 그렇게 만들어버릴까봐, 이 얼기설기 꿰인 실들이 언제라도 풀려버릴까봐 왠지 만지기가 겁났다. 여기에 어떤 시간들이 담겨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것은 파란 바지의 의인이 꿰어낸 코스터다.

그는 사고 후유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수면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세월호의 기억과 현재의 고통 사이에서 그가 찾은 것이 양말목공예였다고 했다. 나는 양손으로 양말목을 이리저리 겹쳐가며 튼튼한 직물을 직조해가는 그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의 양손. 그의 튼튼한 손. 그의 튼튼하고 슬픈 손. 자신을 해한 손. 흉터가 남은 손. 사람들을 끌어낸 손.

나는 코스터가 그의 손과 꼭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군데군데 옹이와 주름이 졌지만 울퉁불퉁한 채로 완결성을 지닌 그의 코스터는 직접 짠 직물답게 안쪽으로 둥글게 말려 있다. 위에 컵을 올려두면 코스터는 부드럽게 위를 향해 모서리를 세운다. 컵에서 떨어지는 물을 가볍게 받아내서 자신 안으로 흡수하는 코스터를 보며 그의 손에 스며든 물을 떠올린다. 동그랗게 모은 그의 손. 그의 손에 실린 물의 기억과, 직물 사이사이로 숨은 긴 잠을 떠올린다. 그의 손이 보라색과 회색, 푸른색과 노란색, 채도와 명도가 다른 초록색, 짙은 회색과 빛나는 살구색 바닷속을, 양말목 더미 속을 헤메는 일을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그의 튼튼한 손을 너무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코스터며 함께 산 크로스백이 걱정 없이 튼튼하다. 한 모서리에 달린 노란 리본이 감상에 빠지는 나를 붙잡아세운다. 쨍한 노란색은 어김없이 정신을 차리라는 신호다. 기억을 멈추지 말라는 신호다. 감상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코스터도 크로스백도 제 몸으로 예증한다.

그의 푸른 코스터들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가 화물을 싣고 나르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그가 그 거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화물을 옮겼어야 했을 것이다. 소방호스 대신 아내와 딸의 두 팔이 몸을 감았어야 했을 것이다. 근막통증증후군 대신 하루를 마감하는 뻐근한 목과 어깨가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빠지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따뜻한 물을 끓여 컵에 가득 담고 차를 우린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꼭꼭 손을 잡고 싶다. 아래 위로 단정히 겹쳐진 이 양말목들처럼 그날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손을 차곡차곡 겹쳐잡고 싶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을 이렇게 잔뜩 꿰어가지고 돌아오고 싶다. 그래서 차를 몇 잔이고 우려서, 봄날에 어울리는 홍차며 커피를 내려서 손에 쥐어주고 싶다. 매끈하고 거친 그들의 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나는 조용히 차를 따르고 향을 피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코스터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매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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