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김하나] 바다에도 봄이 온다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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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삼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예스24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를 진행하며,

『말하기를 말하기』, 『힘 빼기의 기술』,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쓰신 김하나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바다에도 봄이 온다>

 

8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을 읽다가 거의 마지막에 다다른 799페이지에서 이런 부분을 마주쳤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에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들은 대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충격을 받아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걷다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포옹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어서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문장이 있었다. ‘집단적 기쁨과 비견되는, 집단적 슬픔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동물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곧바로 두 해를 떠올렸다. 2002년과 2014년.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 소식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것은 집단적 기쁨의 동물적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014년. 그해 봄 나는 세월호에 관한 뉴스를 며칠째 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주 일요일은 부활절이었다. 나는 도저히 집에 혼자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가, 중구 정동 3번지 성공회성당을 찾았다.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는 나지만 그 오래된 건물의 뒤쪽 의자에 앉아 미사에 참여했다. 높은 천장 아래 울려퍼지는 찬송가와 오르간 소리, 다닥다닥 붙어 앉은 사람들의 뒤통수. 나직한 목소리의 사제는 강론 끝에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 연신 옷소매로 훔쳐야 했다.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그 몸짓을 보고 있자니 ‘슬픔을 나눈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낯선 사람들 속에 홀로 앉아 나는 슬픔을 나누었다. 그 함께 있음 자체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곳의 좁은 나무의자에 앉아 눈물을 닦으며 회당會堂, 사람들이 모이는 집이 생겨난 까닭에 대해 짐작했다. 이것이 ‘집단적 슬픔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동물적인 반응’이라는 표현을 보고 내가 2014년의 봄을 떠올린 이유다.

인간은 작고 약하다. 그런 인간에게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감정이 찾아들면 그는 자연스레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광막한 자연 속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으로 나가는 것이다. 거대한 기쁨도, 거대한 슬픔도 한 인간 속으로부터 흘러넘쳐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이어질 때 비로소 물결이 되고 집단의 기억이 된다.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숱한 생명을 떠내려보낸 이 참혹하고 슬픈 사건이 정치적 공방이 되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가슴이 찢긴 사람들을 오히려 죄인으로 만든 저 끔찍한 역사의 암초에도 불구하고 물결은 흘러야 한다. 잊을 수가 없어서, 또 잊지 않기 위해 쓴 여러 작가들의 수많은 글을 읽으며 나는 여전히 그 물결이 우리라는 공간을 흐르고 있음을 믿는다. 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작고 약하지만 손을 맞잡고 잊지 않으면 우리는 물결이 되어 거대한 바다에 이를 수 있다. 세상에는 바다라는 푸르고 광대한 공간이 그만큼의 커다란 슬픔이 되어 사무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슬픔의 바다로 이르는 물결이 되겠다.

레이첼 카슨의 1961년작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읽다가 예상치 못하게 큰 위로가 되는 부분을 만났다. ‘바다가 한 해 동안 겪는 변화’라는 장에서, 카슨은 연둣빛 새순과 벙근 꽃망울, 철새의 이주, 개구리의 합창 소리 등등 봄이 오는 징후를 나열한 뒤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육지와 관련해서만 생각하고, 바다에는 다가오는 봄을 이런 식으로 느낄 여지가 없다고 쉽게 단정 짓는다. 그러나 바다에도 어김없이 그런 징후가 있으며, 혜안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징후 역시 깨어나는 봄을 느낄 수 있는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육지와 마찬가지로 바다에서도 봄은 생명이 새로 피어나는 계절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놀랍기 그지없다. 긴 겨울 동안 찬 기운을 빨아들였던 바다 표면의 물은 무거워져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하고, 아래에 있던 따뜻한 층이 무기질을 싣고 올라오며 바닷물은 온통 크게 뒤섞인다. 겨울 동안 잠자고 있던 규조류와 미세 식물 플랑크톤이 무기질과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만나 깨어나고 천문학적 규모로 증식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순식간에 생장해 바닷물을 붉은색, 갈색, 초록색 등 다채로운 색깔의 담요처럼 뒤덮어버린다. 이어서 작은 동물들이 불어나고, 이주하는 물고기 떼가 북적거린다.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빙어 떼가 깊은 바다로 모여들고, 대구는 로포텐 제방까지 다가갔다 아일랜드 해안 앞바다로 모여든다. 육지에서 봄꽃이 피어나며 세상을 뒤덮는 것처럼 바다에서도 따스한 봄이 찾아와 온갖 생명이 태어나고 법석이는 변화를 맞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되어 새삼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잊지 않으려고, 또 여러분도 잊지 마시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본다.

바다에도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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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에세이를 통해, 공함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월간 십육일에서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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