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세월호는 아직, 여기에... 목포 신항만

언론 속 4·16재단
작성자
4・16재단
작성일
2023-12-22 11:55
조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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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기사 내용

목포 신항만에는 2017년부터 6년째 묘박중인 배가 있다. 세월호다. 지난 10월의 마지막 주, 신항만을 찾았다. 신항 북문으로 가는 길에 노란색 리본이 매달려 있었고, 북문 앞에는 미수습자 다섯 명의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북문 사거리에는 진실을 인양하라는 문구부터 세월호 지우기 중단까지 6년의 세월이 현수막에 적혀 있었고 입구 옆에는 작은 컨테이너 두 개가 나란히 자리했다.

멀찌감치 세월호가 보였다.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색칠한 배, 천 일 넘게 바닷속에 있던 그 배, 2014년 4월 16일 결국은 기울어진 순간부터 인양하기까지 온 국민이 함께 지켜봐 온 배였다.


입구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았다. 경비원은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 있는 안내사항을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안내사항에는 세월호를 배경으로 인물사진을 찍지 말라는 문구가 있었다. 천천히 세월호 선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금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펜스 사이로만 볼 수 있었다. 바다 가까이 안벽 근처에 세월호 선체가 있고 그 앞에는 세월호에서 나온 펄과 부품들이 길게 줄을 지어 놓여 있었다.

사람 몸통만 한 고철이 휘고 비틀어지고 잘려나간 흔적이 펜스 사이로 또렷하게 보였다. 용달차는 뒷부분이 잘려 나가고 바닥으로 주저앉은 운전석만 남았다. 포크레인은 위아래가 뜯어져 내부가 훤히 보였고, 강원도에 왔을 포크레인의 차량번호판에는 번호가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노란색이고 하얀색이었을, 배를 받쳤을 쇠기둥은 페인트칠이 모두 벗겨져 바닥에 부스러져있고, 환기구였을 네모난 쇠붙이는 녹이 슬고 찌그러져 다른 쇠붙이 사이에 끼어있었다.

검은색 고무호스들이 더미를 이뤄 쌓여 있고, 커다란 렉커차가 찌그러져 있다. 커다란 바퀴들도 바람이 모두 빠져 주저앉아 있었다. 아마도 문이었을 네모난 나무판에 둥그런 창문이 달려 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작고 둥그런 창문 바깥을 내다보기도 했을까? 밤에는 불꽃놀이를 하기도 했다는데 불꽃과 별빛을 보기도 했을까?

목포 신항에 달려간 이유

2017년 3월 목포신항만에 세월호가 왔다. 김애숙씨는 신항으로 달려갔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가야될 것 같아서'라는 말 밖에는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허허벌판인 곳에 유가족이 있을 곳이 없을 텐데 발을 동동 구르며 신항으로 향했다. 급하게 신항 북문에 텐트를 쳤고, 항만 옆 삼호중공업 노조 조합원들이 텐트가 젖지 않도록 바닥에 천막을 깔았다. 주위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리본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달려 있었다. 목포 촛불집회에서 만난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인양 소식에 '세월호잊지않기 목포지역 공동실천회의'(이하 실천회의)를 만들었고 몇 달 전부터 준비한 리본이었다.

배가 들어 온 첫날부터 김애숙씨는 매일 신항엘 갔다. 임시로 만든 텐트는 커다란 컨테이너로 바뀌었고 봉사자 부스라 부르는 그곳에서 리본을 만들었다. 옷마다 본드가 묻어 멀쩡한 옷이 없었다. 집에 가져가 리본을 만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세월호를 찾았다.

봉사자 부스에 매일 있으면서 '유명한 정치인'은 다 본 것 같았다. 혼자 조용히 왔다 간 한두 명을 빼고는 '속없이' 세월호를 뒤에 두고 인증샷을 찍었다. 기울어지고 녹슨 배와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는 유가족이 있는 곳으로 갔고 리본을 만들었다. 신항에는 더운 5월, 6월에도 한겨울 파카를 입고 너무 춥다던 경빈 엄마가 있었고 전경에게 음료를 가져다 준 영석 엄마와 몇 번이나 단식하며 진상규명을 외친 동수 아빠가 있었다.

김애숙씨처럼 '가야할 것 같아서' 오는 시민들도 있었다. 뭐라도 해주고 싶다며 모금함을 찾는 사람들, 경북에서 혼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간 사람, 영광에서 갓김치를 담가 택시를 타고 와 울면서 내리던 할머니, 신항에 있는 304명의 사진을 보곤 '우리 애기들'하며 억울해하던 사람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걸 다 한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10년을 어떻게 계속 활동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김애숙씨는 자신은 시간이 많아서라고 했지만, 봉사자 부스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거듭했다. 무엇보다 유가족과 보낸 시간, 그들과 한 약속이 컸다.

"새해 첫날하고 추석 전날 상차림을 해요. 처음에는 안 했었는데, 몇 년 전에 차례상하자 해서 시작했죠. 순범이 엄마가 우리랑 많이 친해지니까 이거(상차림) 끝날 때까지 해줄 거지? 해결될 때까지? 이러더라고. 해야죠. 이제 유가족하고 연대가 돼 있잖아요."

유가족들의 투쟁과 시민들의 연대로 어렵게 선조위(세월호 선제초사위원회)와 사참위(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신항을 찾는 사람들도 뜸해졌고 때마다 찾던 정치인들은 세월호 대신 재래시장을 찾았다. '이제야 매듭이 좀 풀리나 싶어'지던 때도 김애숙씨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개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목포 4.16공감단'을 만들어 봉사자 부스를 지켰고, 매년 두 번씩 상차림하며 진실이 밝혀지기만 기다렸다.

상차림은 실천회의에서 예산을 모으고 공감단에서 준비한다. 상차림 음식을 허투루 할 수는 없어 공감단 단장 김영미씨와 김애숙씨는 몇 달 전부터 바빠진다. 낚싯배에서 잡은 생선을 직접 손질해서 말리고, 봉사자 부스에 앉아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긴다. 그렇게 준비한 상차림 음식은 유가족들이 꼭 가져갔다. 팽목에 가져가기도 하고 유가족들이 나눠 먹는다면서. 유가족들은 상차림을 준비하는 공감단에 늘 고맙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김애숙씨는 몇 달간 상차림을 준비하고, 몇 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자신도 '부모니까'하고 말을 이었다.

"저도 부모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억울하잖아요. 원인을 알아야지, 왜 이렇게 됐는지. 살 수도 있는데, 살 수가 있었잖아. 건질 수 있었잖아! 다 내 자식 같고, 나는 부모니까." 

아직도 세월호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촛불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진상규명은 그대로였다. 선조위도 사참위도 왜 배가 가라앉았는지, 왜 구하지 않았는지 결국 알아낼 수 없었다. 세월호 선체도 개방을 한댔다 안 한댔다, 안전생명공원 설립도 지연됐다.

또 한 번 정권이 바뀌었고 선체 내부는 출입이 완전히 금지됐다. 선체가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하루 아침에 선체가 있는 항만으로 들어가는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유가족과 실천회의는 급하게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안내문만 크게 걸렸다. '다시는 없어야 할 재난'에 김애숙씨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큼 '닥치는 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있을 한 건 정부를 믿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부를 못 믿죠. 믿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세월호가 안 터졌으면 (내) 삶은 별로 변함이 없죠. 그런데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세상은 안 바뀐다. 이게 내 일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언젠가 우리한테 닥칠 일이잖아요."

그리고 이태원.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이 구조되었다면, 그 아이들이 커서 클럽도 가고 핼러윈도 즐겼을 것이다. '우리 세월호 애들이' 딱 그 나이였다. 김애숙씨의 아들은 작년에 군대에 있어 이태원에 가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이태원에 놀러 갔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세월호도 이태원도 내 일'이었다. 김애숙씨는 안전한 사회가 아니라는 걸 또 한번 느꼈고 진상규명이 무엇보다 간절했다. 그런데도 '아직도 세월호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김애숙씨는 가장 화나는 게 그런 말이라며 한참을 울먹였다.

"누가 아직도 세월호 거기 있어? 그러는데 해결이 안 됐으니까 있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 해줬으면 됐지' 이런 말들이 너무 무서운 것 같아요. 보상금 받으려고 한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거든요. 선체가 위험하다고 출입금지했는데, 위험하다고만 하지말고 빨리 진상규명해서 해결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있다가 진상규명도 안 되고 없어지면 어쩌나 싶어요."

10년이 지나면서 시민 모임도 많이 사라졌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힘이 많이 빠졌다. 진실은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럼에도 김애숙씨가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건 노란 리본 때문이다. 녹슨 고철이 무섭다고 없애자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가방에 여전히 노란색 리본이 걸려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봉사자 부스에서 공감단 회원들과 혹은 유가족들과 만든 리본일까? '어디서 났냐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뿌듯했다.

정부는 믿을 수 없고 속 모르는 얘기를 떠벌리는 사람도 있지만, 세월호를 잊지 못한, 잊지 않을 사람이 더 많다는 걸, 그런 사람들의 힘은 믿을 만하다는 걸 김애숙씨는 익혀 왔다. 그 힘으로 봉사자 부스에서 시작한 활동이 다른 단체까지 넓어졌지만, 김애숙씨에게는 '세월호가 1번'이고 '여기, 신항이 먼저'였다. 그렇게 10년 동안 봉사자 부스를 오갔다.

김애숙씨는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잘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끝날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한 순범이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려 한다. 그 끝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으려 한다. '끝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끝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함께 걸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김애숙씨는 기도한다.

세월호 선체 보전 장소가 어렵게 정해졌다. 그러나 세월호 이동 방안과 함께 세월호 안에 있던 자동차와 유류품 폐기 문제와 추모관 등의 공간 설립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또한 가족에게로 돌아오지 못한 승객이 다섯 있다. 녹이 슨 세월호 선체는 항만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머물고 있다. 선체와 함께 인양되리라 기대했던 진실과 진상은 인양되지 않은 채, 관련자는 무죄를 받고 책임자는 풀려나기도 하는 2023년. 세월호는 아직,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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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 정윤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