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재단 기자단] 민들레빛_바다의 등대 김관홍을 기록하다.

고 김관홍 잠수사 추모제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 북콘서트

이바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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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온마음센터 #416민간잠수사회 #김관홍법

안녕하세요! 4·16재단 대학생 기자단 ‘민들레빛’ 취재기자 이바다입니다. 6월 취재는 고 김관홍 잠수사의 5주기를 추모하는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 북콘서트
현장입니다.

▲ 원목 책꽂이로 된 벽면에 노란색 행사 현수막이 걸려 있다. 현수막의 왼편
에는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 북콘서트’라는 제목고 함께 공동 주최, 행사 일시, 행
사 장소가 검정 글씨로 적혀있다. 오른편에는 도서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의 사진
이 삽입되어 있다.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 북콘서트
@은평상상허브(21.06.17. 19:00 KST)

2014년 4월 16일에 전국민의 마음을 안도시켰던
최악의 ‘전원구조 오보’를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사실을 들여다보니 제대로 된 구조는커녕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한 컨트롤타워 하나
없었죠. 국가가 당연히 책임져야 했을 일을 방치했을 때, 내 일인 것처럼 나섰던 영웅들이 있습니다.바로 세월호 참사 현장에 있던 ‘민간잠수사’인데요.

그들은 누구보다 헌신하며 잠수병까지 얻었으나 국가에게 외면당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소외당했습니다. 그리하여 고 김관홍 잠수사는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나셨고, 동료들은 부탁받은 뒷일을 위해 아직까지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그 현장을 지금 보여드립니다.

※본 게시물에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원목 책꽂이로 된 벽면에 노란색 행사 현수막이 걸려 있다. 현수막의 왼편
에는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 북콘서트’라는 제목고 함께 공동 주최, 행사 일시, 행
사 장소가 검정 글씨로 적혀있다. 오른편에는 도서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의 사진
이 삽입되어 있다.

북콘서트의 패널로
황병주 잠수사, 김상우 잠수사, (사)4.16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 박주민 의원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황병주 잠수사와 김상우 잠수사께서는
세월호 참사 당시 현장에서 고 김관홍 잠수사와 함께 구조에 헌신하셨던 당사자이시고요.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단원고등학교 2학년 3반 유예은 학생 아빠이시며
오늘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계십니다.

박주민 의원은 (사)4.16가족협의회 법률대리인 출신으로 세월호 민간잠수사를 지원하는 ‘김관홍법(4·16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의 대표발의자입니다.행사는 온·오프라인에서 동시 진행되었습니다. 유튜브 채널 <박주민 TV>로 다시 보실 수 있으니, 시간 내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책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는 구조 현장에 투입된 민간잠수사 11명의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잠수했던 내용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
이렇게 책이라는 결과로 낳아졌다고 합니다. 북콘서트는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민간잠수사들께서 참사 이전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와 참사 당시 현장에서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를 나눠주셨고요. 또 참사 이후에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와
ü김관홍법과 진상규명을 어떻게 보고 생각해야 하는지도 말씀해주셨습니다.

– Q. 참사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사셨나요?
A. 4월 16일 이전에는 평범한 직업잠수사였습니다. 직업잠수사는 해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니다. 직업잠수사는 제가 좋아하는 직업이었고, 또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남 부럽지 않게 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참사 이후, 세월호 현장을 가고 난 이후에는 많이 변했습니다.(황병주 잠수사)

A. 저는 토목잠수사입니다. 해저케이블, 다리 등 수중에서 토목공사를 했습니다. 토목잠수사는 레포츠 잠수가 아니라, 잠수를 전문적으로 해서 물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합니다. 그런데 현장에 다녀와서는 10명 이상의 잠수사들이 트라우마와 골괴사, 디스크 등으로 인해 잠수를 못하고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잠수를 하지 못하고 현재 다른 일을 하거나 치료를받고 지냅니다.
(김상우 잠수사)

A. 다니던 로펌을 나와서 민변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사실 돈 버는 일로 변호사를 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가족 분들 옆에서 돈 버는 일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이제 삶이 좀 변화했고 또 정치도 하게 됐고, 그래서 그 이전하고는 굉장히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박주민 의원)

Q. 가족분들께서 그 당시에 잠수사를 보는 마음은 어땠습니까?
A. 지금과 그 당시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굉장히 다릅니다. 2014년 4월 초반 그때로 돌아가면, 일단 첫 번째로 자원에서 그 현장에 잠수사로 왔다는 걸 믿는 가족이 없었어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했던 건, 참사 초반 며칠동안 전국 공무원, 경찰, 시민, 언론이라고 하는 신원 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이상한 얘기를 했어요. 그런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만나면서 정말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를 배웠거든요. 그래서 잠수사 분들이 민간잠수사라고 자원봉사하러 왔다고, 보수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그 이후에 잠수를 어떤 조건에서 했는지, 또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비상식적인 잠수를 하면서 희생자를 수습하고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죠. 그러면서부터 마음이 열리고 많이 의지를 하게 됐던 것 같고요.
(유경근 집행위원장)

Q. 사고 초기 제대로 된 규율과 통제 없이 한정된 인원으로 구조활동을 하시느라
무리하셨다고 책에 나와있는데요. 아픈 기억이겠지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어요?
A. 방금 집행위원장님께서 저희를 못 믿으셨다고 하셨잖아요. 저희는 그 때 당시에 정말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가족들 보는데 이 보이지 말자. 혹시라도 웃음이라도 미소라도 짓지 말자. 우리가 같이 슬퍼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초기에 임했고요. 정말로 사회자님 말씀처럼 질서도 없었고, 처음에 다이빙 할 때 잠수사들 6명 있었어요. 그런데 배에 수십 명이 올라와요. 그걸 다 누가 정리하느냐? 해경이 정리한 게 아니에요. 유경근 씨 동생 유호근 씨가 저희랑 같이 있었거든요. 호근 씨가 다 정리를 했어요. 해경은 그런 걸 하나 정리하지 못했고, 우리는 무리하게 작업을 했어요. 제가 30년 동안 잠수를 했지만 하루에 네물때 다이빙해본 건 생전 처음이었어요. 이런 일은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없을 거예요. 첫탕에 들어가서 하나도 안 보였을 때 손으로 더듬으니까 아이들 머리가 여러 명이 동시에
감각이 오더라고요. 물론 그 때 시신을 인양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지만 그게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물 속에서 정말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어요. 그러고 애들 끼고 올라와서 배 위에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꺽꺽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황병주 잠수사)

A. 사람들은 잠수를 잘 모르니까 자세히 설명해드리자면, 처음에 잠수를 할 때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다 그 장비가 23일에 왔고 그 전에는 해경배에서 잠수를 했어요. 네 물때에 잠수를 하는데 잘 곳이 없어서, 잠수슈트를 입고 벗고 샤워할 때도 없어서, 그걸 하루 종일 입고, 자고, 밥 먹고 그렇게 지냈어요. 나중에 전문 장비가 왔을 때 그 소속 잠수사라고 오해를 많이 받았는데, 다 자원봉사로 개개인으로 왔거든요. 그 장비로 잠수만 했지 다 봉사하러 온 사람들이에요. 두 달 동안 제때 잠을 잘 수 없었고, 해군은 튼튼한 헬멧 쓰고 넓은 곳으로 들어가는데 저희는 좁은 객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최대한 날렵하게 입었어요. 헬멧도 안면마스크만 쓰고, 비상탱크도 없고, 공기 호스도 가장 가는 호스를 달았어요. 그래야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니까. 그리고 수중에서도 희생자를 올릴 때는 한 손으로 로프를 오를 수 없어요. 양 손을 써야하죠. 그러면 얼굴을 마주하고, 희생자를 안고 와야해요. 저희는 주로 객실에 있는 아이들을 찾았는데 다들 팔짱을 끼고 있어요. 수온이 낮았는지 아이들이 놀랐는지 팔짱이 잘 안 풀어지더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에게 말해요. 엄마한테 가자, 아빠한테 가자. 그렇게 한 명씩 데려왔던 기억이 나고요. 사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유가족 보면 생각도 안 나요. 한 명이라도 더 빨리 찾으려고 애썼고, 정부에서 불명예스럽게 나가라고 해서 7월 10일에 나간 게 지금까지도 속상합니다. 관홍이 형도 그렇게 얘기해요. 끝까지 다 찾으려고 했는데 퇴거명령이 있어서, 그게 지금까지 아쉽습니다.
(김상우 잠수사)

Q. 국가의 무능 앞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큰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하셨는데요. 결국 불명예스럽게 나오시고 약속과 다르게 국가는 책임도 지지 않고 치유도 해주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 트라우마와 극복 과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A. 7월 7일에 태풍 때문에 바지선 전체가 피항했고 저희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어요. 9일에 태풍이 지나갔고, 10일에 집결하기로 했습니다. 10일 아침에 집결해야 하니까 9일 저녁에 하나 같이 목포로 내려가는데 도중에 해경청장에게 문자를 받았어요. 그 내용이 그동안 고생 많았고, 잠수 방법을 바꾸기 위해 여러분들은 쉬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죠. 전부 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저희가 여지껏 정말로 잠도 못자고 고생해서,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걸 해서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수습했고, 끝까지 명예롭게 자랑스럽게 일을 다 해내고 싶은데. 갑자기 잠수 방법을 바꾸겠다고 다 나가라니요. 그때부터 마음의 상처를 굉장히 많이 입었어요. 잠수하면서 얻은 트라우마도 있지만 이 상처가 더 큰 거예요. 정말로 자랑스럽게
하고 싶었는데 쫓겨났거든요. 잠수 방법을 바꿀 거면 방법만 바꿔서 우리가 하면 되잖아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트라우마보다 더 큰 상처가 다시 트라우마가 됐죠. 그리고 해경이 병원에 가라고 해서 검사를 하니까 골괴사부터 여러 잠수병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입원하고 3~4일 있으니까 해경청장이 병원에 왔어요. 다 산재에 준하는 치료와 보상을 해줄 거니까 걱정 말고 치료를 받으라고. 그랬는데 막상 청장 바뀌고 나니까 아무것도 안 해줬어요. 그런 것들이 상처가 되는 거예요. 아이들 인양하는 트라우마도 있지만 이런 상처가 계속 트라우마가 되는 거예요. 저도 그랬고 관홍이도 그랬고 생활을 못 할 정도예요. 관홍이가 같이 있을 때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런 시그널을 많이 줬는데 저희는 몰랐던 거예요. 나도 너무 아팠고, 여유가 없었으니까. 나 역시도 어떻게 죽을까 매일 생각했고. 지금도 내 상처가, 내 트라우마가 다 치료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겠고요.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황병주 잠수사)

A. 황병주 잠수사가 울컥하신 것 같은데, 저는 트라우마라는 단어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도 무학여중 아이들을 찾았고, 서해에서 페리호가 침몰했을 때도 현장에서 잠수를 했어요. 그때는 트라우마도 없었어요. 그런데 세월호만 왜 이런지 저도 궁금하네요. 황병주 잠수사께서 2014~2015년에 가장 상황이 안 좋으셨어요. 유서를 쓰셨죠. 우리가 구조할 때 조류가 센데도 들어가라고 했어요. 다치면 치료해줄 테니까 들어가라고. 그런데 막상 나와보니 치료를 해주지 않더라고요. 2014년도 치료 지원이 9월까지 되다가 뚝 끊기고, 다시 되고 끊기고를 세 번 정도 반복했어요. 그러니까 신뢰가 더 없죠. 그리고 치료 지원 문제로 여러 가지 문제가 좀 많았어요. 잠수 때문에 아픈 사람은 많아지는데, 치료는 안 해주고, 우리는 자비로 치료 받아야 하는데 현장에서 일은 할 수가 없고.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잠수사들이 더더욱 힘들어진 것 같아요. 다들 다시 현장에서 일해야 하니까 트라우마를 잊어보자고 노력했어요.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지만, 그래서 지금은 트라우마가 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안고 가고 있어요. 오히려 이게 낫더라고요. 슬프면 슬픈대로, 눈물이 나면 울고, 화가 나면 화내고. 세월호 참사 장면이 영상처럼 평생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일생에서 이걸 없앨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같이 가는 것으로, 그렇게 조금씩 이겨내고 있습니다.
(김상우 잠수사)

Q. 작년 5월에 통과된 김관홍법(4·16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개정안)의 내용과 이것이 발의되기까지의 과정을 나눠주세요. A. 그동안 민간잠수사 분들께 어려움이 많았죠. 애초에 만들어졌던 특별법에는 민간잠수사에 대한 내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민간잠수사를 포함해 여러 도움을 주신 분들을 피해자의 범위에 넣도록 발의를 했어요. 트라우마나 치료에 대해서 경제적 손실 보장까지 받으실 수 있도록요. 제가 발의를 하고 나서 소관 상임위를 통과하기까지 제 기억에 1년 반 이상이 걸렸고, 범사위로 넘어갔을 땐 대부분 내용마저 삭제됐더라고요. 유일하게 남은 게 잠수사에 대한 금전적 지원 정도예요.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민간삼수사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치유하기에는 부족해서 21대 국회 현재 안산을 지역구로 두는 두 의원이 특별법 개정안을 다시 발의한 상태이고요. 농해수위에서 먼저 입안된 순서대로 처리하느리 지금 당장 심의가 안 되고 있는데, 순서가 오면 통과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주민 의원)

Q. 법안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을까요?

A. 법안이 통과되면서 삭제된 내용 중에 제일 얘기하고 싶은 건, 우리가 피해자에 포함이 안 됐다는 거예요. 피해자에 포함이 안 되는데 치료나 보상이 잘 될 턱이 없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해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다른 선진국은 민간구조사가 다치면 피해자 범위에 넣는 게 보통인데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관심이 없는 건지. 그런데 사실 이런 시스템이 잘 이루어져야 나중에 또 이런 참사가 발생하더라도 누군가 발 벗고 나설 수 있겠죠. 지금 상태로 보면 정부가 도와주지 않으니 나서지 마라 이런 식인데 누가 현장에 가겠습니까?
(김상우 잠수사)

Q. 고 김관홍 잠수사의 “뒷일을 부탁합니다”라는 유언에서 뒷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A. 우리는 그 뒷일이 뭘까, 무엇을 부탁하신 걸까 깊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진상규명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관홍이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또 있거든요. 그것을 제 나름대로 해석한 것은, 사고가 났던 그 날 세월호로 달려갔던 그 마음, 그 진심. 그리고 내가 잠수사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그 일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부심에 상처를 내고, 폄훼하고, 모욕했던 일들.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결국에는 스스로 삶을 유지할 이유를 놓쳐버린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관홍이가 부탁한 뒷일이 진상규명인 것은 맞지만, 그 진상규명에는 민간잠수사가 겪은 수많은 부당한 일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저희가 처음에는 잠수사를 오해했고, 해경이나 해수부에서 이간질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오해를 했구나, 이간질을 당했구나 깨달을 수 있었어요. 깨달은 계기가 뭐냐면, 진상규명을 했기 때문이에요.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섰고,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려고 하다 보니 우리 아이들을 수습하는 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만약 저희가 진상규명에 관심이 없었다면 오늘처럼 우리가 함께 하는 자리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김관홍 잠수사가 부탁한 뒷일은 ‘뭉뚱그린 진상규명’이 아니라, 실제로 당했던 그 일들을 모든 과정까지 규명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되살리고, 다시 평가하고, 그것을 계기로 우리 가족들과 민간잠수사가 법을 통해 함께 해쳐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상규명과 민간잠수사의 명예회복은 별개가 아닌 거죠.(유경근 집행위원장)

– 글을 읽는 여러분이 현장에 녹아들 수 있도록, 길고 투박하지만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도우려고 했던 그 마음들. 그것이 왜곡되지 않고 민간잠수사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이 어서
갖추어지길 바랍니다. 사고 현장에 발 벗고 나선 많은 잠수사들께서는
여전히 많은 왜곡, 상처, 트라우마와 싸우고 계십니다.뿐만 아니라 국가가 약속했던 치료와 보상은 허울에 불과했고요.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국가 시스템은 작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사고 현장에는 민간잠수사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북콘서트 현장에서 유경근 집행위원장은“민간잠수사는 사람을 구하러 왔는데 국가는 배를 인양하려고 했다. 잠수 방법만 바꾸고
사람들은 그대로 쓰면 되는 것을, 굳이 이 사람들을 쫓아낸 것은 정말 마지막 한 명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을까봐 그런 거다. 해경이든 정부든 배는 이미 침몰했고, 사람은 벌써
죽었는데 배를 건지면 되지 왜 사람을 일일이 꺼내냐는 식이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16재단과 함께 일상이 안전한 사회 만들기, 참사의 진상규명, 그리고 민간잠수사의 일상과 명예 회복에 마음을 보태주세요.

우리의 작은 마음이 모여
민간잠수사 분들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그리고 고 김관홍 잠수사의 명예가 회복되고 유가족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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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관홍 잠수사 추모식

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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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월호 잠수사다> 북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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