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묵 활동가 사진. 회색 배경을 뒤에 두고 검정색 옷을 입은 김주묵 활동가가 본인의 두 손을 맞잡고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출처: 시민과 동행하는 신문 춘천 사람들(이강희)>
이바다 기자
안녕하세요! 4·16재단 대학생 기자단 ‘민들레빛’ 취재기자 이바다입니다.
9월 취재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춘천 지역에서 애쓰시는 활동가 인터뷰입니다.
4·16연대 운영위원이자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춘천 시민행동(이하 세월호춘천시민) 공동대표 겸 집행위원장이신 김주묵 활동가를 만나보았습니다.
가슴 뜨겁고 마음 따뜻한 인터뷰 속으로 가보시죠!
▲인터뷰 현장 사진. 옆면은 통창이고 뒷벽은 책장인 카페에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왼쪽에 김주묵 활동가가, 오른쪽에 취재기자 이바다가 앉아 있다. 취재기자는 노트북으로 인터뷰 내용을 받아 적고 있다.
이바다: 안녕하세요. 4·16재단 대학생 기자단 ‘민들레빛’ 이바다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 제가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김주묵: 제가 세월호 춘천시민에서 공동대표 겸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편하게 위원장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바다: 네, 알겠습니다.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아무래도 참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까. 혹시 트라우마가 있거나 말씀하시기 불편한 지점이 있다면 언제든 인터뷰를 중단하셔도 됩니다.
김주묵: 네, 알겠습니다.
이바다: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어요?
김주묵: 저는 진보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당시에 동년배 아들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분노와 허탈감,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먹먹함을 느꼈어요. 말로는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막막함. 그래서 지역에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춘천의 17개 단체를 모아 세월호 춘천시민을 결성했어요. 그때부터 단체와 함께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또 4·16연대 운영위원으로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바다: 제가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유가족과 여러 시민을 만나보니, 많은 사람이 유독 2014년 4월 16일을 또렷이 기억하시더라고요. 위원장님께서는 그날, 그리고 사고를 알게 된 순간에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신가요?
김주묵: 정말 보통 일상이었어요. 생업으로 인쇄기획사를 운영해서 사무실에 쭉 있다가 사고 속보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됐어요. 당시에 사고를 접하고 “지금이 2010년대인데 저렇게 큰 배가 침몰해서 사람이 죽는 건 말도 안 된다. 충분히 구조될 거다.”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전원 구조라던지 그런 뉴스가 나와서 안심을 많이 했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구조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걸 나중에 알고서는 ‘왜?’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왜 삼백여 명의 국민을 구하지 않고 죽게 놔뒀는지. 이제는 알잖아요. 세월호 참사는 구조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는 걸요. 이것에 대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책임질 사람은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반복될 겁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횡행하는 비리 모두 똑같아요. 봐줘서는 안 돼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저도 국민들도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아요. 이런 게 낙후된 사회이고 후진적인 국가라는 걸요.
이바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세월호 추모 현수막을 절도·손괴한 김진태 후보 선거 관계자를 현장에서 잡으셨잖아요. 그 당시 현장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김주묵: 그 사건에 앞서서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 때에도 춘천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열렬하고 뜨거웠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김진태라는 지역 국회의원 때문이었죠.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둥 막말이 심했어요. 매주 집회를 계획하면서 우리끼리 “이번에는 어떤 막말을 할까?”라고 논의를 해요. 그럼 또 어김없이 막말하고, 막말하면 우리가 예상하고 계획했던 것보다 시민들이 훨씬 많이 모이세요. 그러다가 2020년 총선 시기가 다가왔고, 이게 세월호 참사 추모 기간이랑 겹쳤어요. 우리는 당연히 참사를 추모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한 목소리를 냈죠. 그 방법이 시내 주요 도시에 펼침막 현수막을 쭉
내건 것이었는데요. 시민들로부터 현수막 문구도 직접 받고, 또 현수막 게시도 같이 했어요. 현수막을 다 걸고 나서 현수막을 처음 걸어보는 사람들이 조금 느슨하게 작업해둔 곳을 마지막으로 정비하려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도로에 도착하니 한 블록만큼 현수막이 사라진 거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현수막 건 곳을 중심으로 다시 시내를 돌았고, 그러다가 현수막을 훼손하는 사람을 직접 적발했어요. 잡고 보니 김진태 후보 선거운동 차량이 주변에 있었고, 열어보니 함부로 뜯고 훼손한 현수막 24개가 나오더라고요.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아침이 되자마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그래서 이게 단순히 어떤 우연이라기보다 우리가 활동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는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바다: 일반 시민도 아닌 국회의원 후보 선거팀이, 심지어 재선에 도전하는 후보 측에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게 참 화나는데요. 검거하는 딱 그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김주묵: 이 사건 전에도 우리가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피켓시위 같은 걸 하면 집요하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학생들에게 와서 정말 욕을 하면서 “너,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춘천에서 못 살 거다. 걸리면 죽는다.”라며 협박을 했죠. 이건 정말 얌전하게 표현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현수막을 찢고 떼 간 그 사람인 거예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당에도 연락을 넣어서 당원 7명 정도가 즉시 모였는데, 활동 현장에서 욕을 들어 왔던 친구가 얘기하더라고요. 이 사람이 때마다 욕했던 그 사람이라고요.
이바다: 이제는 참사 이후로 시간도 많이 흘렀고 지쳤을 법도 한데 여전히 애쓰시는 이유가 있나요?
김주묵: 개인적으로 저는 정말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에요. 평생을 거의 울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2014년 5월에 세월호 부모님들이 처음으로 춘천에를 오셨어요. 저 멀리서 위아래로 까만 옷을 입고 걸어오시는데, 그걸 보고 순간 갑자기 목에 메이고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그 후로도 세월호 참사만 생각하면 일하다 말고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저 깊은 곳에서 뭔가 치밀어오르는 그런 느낌을 받아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아요. 이 사건은 절대 용서할 수 없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걸요. 그리고 대부분의 80년대 학번들이 광주에서 일어났던 학살을 마음에 품고 살며 세상을 바로 보고 살았잖아요? 저도 그랬는데요, 광주 학살처럼 세월호 참사는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해요. 제 가슴 속에는 광주만큼 세월호 참사가 남아있어요. 수심 800m에 떨어진 인공위성 조각 하나도 특수부대가 건져내는 대한민국에서, 그 큰 배가 기울고 있는데 사람 한 명 구하지도 않고, 구조하러 온 사람들 막는 게 말이 되나요? 그래서 저는 세월호 참사를 참사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건 학살이에요. 학살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이바다: 참사가 아니라 학살이라는 말, 무서우면서도 공감되네요.
김주묵: 네, 학살이죠. 제가 제일 먼저 이상하게 여긴 건 참사 당시에 구조활동을막은 거예요. 작은 어선들이나 민간잠수사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고, 주변에서 훈련하던 미군이 띄운 비행기도 돌아가라고 했죠. 더군다나 강원도에서 소방대원들이 헬기를 타고 와서, 사흘을 대기하래서 대기만 하다가, 결국 해경이 돌아가라고 해서 돌아가다가 사고로 순직하셨죠. 도대체, 왜, 구조하러 간 모든 사람을 막았냐는 거예요. 심지어 해군 참모총장이 구조 명령을 내렸는데도 이행이 안 됐죠. 제가 알기로 해군 참모총장의 명령을 꺾을 수 있는 건 딱 셋이에요. 합참의장, 국방부장관, 대통령. 이 셋이 끝인데 어떻게, 왜 명령이 통하지 않았을까요.
이바다: 박근혜 퇴진의 중심에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촛불 정권’ 문재인 정권은 어떤 책임을 져야할까요?
김주묵: 저도 그렇고 제 주변에 많은 사람이 기대했어요. 새롭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 세월호 참사가 해결되리라고요. 세월호 참사만큼은 해결하리라 믿었다고요. 그런데 이제와서 이 정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용서할 수 없다”예요. 막말로 남북교류나 통일은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한반도 현실이니까, 이해해준다고 쳐요. 그렇지만 이런 거, 다른 거 다 못해도 세월호 참사 하나만은 해결을 했어야죠. 왜 구하지 않았는지, 왜 죽게 했는지 속 시원하게 조사하고 국민께 알렸어야죠. 그럼 이제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의 의문을 넘어서 ‘문재인 정부는 왜 아무말도 못할까’라는 문제가 되는 거죠. 진상규명을 못 할 거라면 왜 못 하는지라도 말해주면 좋겠어요.
이바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도 애쓰실 텐데요.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요?
김주묵: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결코 잊지 않도록 기억 활동을 꾸준히 해나갈 것 같아요. 우리가 모두 사건을 잊으면 이것들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리고해결된 줄 아시는 분들도 많아요. 우리는 아직도 서명을 받고 기억 활동을 하는데 몇 분들은 웃더라고요. 아직도 하냐, 다 끝난 거 아니냐 하고요. 아무것도 된 게 없잖아요. 그래서 춘천에서 끝까지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움직이고, 알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안전 사회 건설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7년의 세월을 감히 엿본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 함께해주신 또 한 분이 계셨는데요.
김주묵 활동가를 따라 현장에서 공부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대학생입니다.
이바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최유빈: 저는 강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1학번 최유빈입니다.
이바다: 새내기 대학생인데도 김주묵 활동가를 따라 많은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김주묵 활동가를 보며 어떤 것을 느꼈는지 나눠주세요.
최유빈: 김주묵 위원장님을 처음 뵌 건 고등학생일 때입니다. 춘천에는 ‘날갯짓’이라는 고등학교 연합 동아리가 있는데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곳입니다. 위원장님은 날갯짓에서 활동하는 고등학생 친구들이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그리고 지금 대학생이 되어서도 언제든지 조언을 구할 수 있도록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고 계십니다. 이런 위원장님의 모습을 보며 늘 존경했고, 닮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촛불항쟁 당시에 춘천 민중이 단결한 것도 위원장님의 몫이 컸다고 생각해요. 저도 우리 사회가 불의할지라도 희망을 믿으며 위원장님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그림 5 인터뷰 현장 사진.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이바다, 최유빈, 김주묵. 모두 함께 주먹을 쥐고 ‘투쟁’의 손짓을 하고 있다.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뿐만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는 일에까지, 정말 크고 깊은 활동가를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억하고 노력하는 분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하며, 4·16재단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 사회 건설에 끝까지 힘을 내겠습니다.
#다시_촛불 #다시_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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