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재단은 세월호참사의 아픔을 기억하며, 생명과 안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4·16재단은 이 길을 나란히 걸어줄 ‘기억의 수호자’를 찾고 있는데요. 재난을 겪은 청소년·청년을 응원하고, 그들의 회복과 성장을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한 캠페인입니다.
이번 인터뷰는 4·16재단의 활동을 지지하며 캠페인에 동참한 남아름 감독(다큐멘터리 〈애국소녀〉 연출)을 만나 나눈 이야기입니다. 인터뷰 내내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게 마음을 내어 준 남아름 감독의 진심을 전합니다.

반간습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다큐멘터리 만들고 있는 남아름이라고 합니다. 최근 <애국소녀>라는 작품으로 인사드렸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이 질문이 가장 어려워요. 2014년 4월 16일, 그날에 대한 기억을 첫 질문으로 드립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저는 막 스무 살이 되었고, 다시 대입을 준비하며 재수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학원에서는 수업 중 휴대전화를 전혀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사실상 세상과 단절된 채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의 속보도, 상황도 처음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휴대전화를 몰래 갖고 있던 몇몇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을 통해 ‘얘들아, 배가 침몰했대‘라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처음 들었을 때는 교과서 속 사건 하나처럼 느껴졌습니다. ‘곧 구조되겠지‘ 하고, 설마 그런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제가 다니던 재수학원은 안양 평촌 학원가에 있었는데, 안양뿐 아니라 안산 지역 학생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실제로 단원고를 졸업한 학생들도 있었고요.
그래서인지 학원 안에는 재수생들이 동요할까 봐, 그 일에 대해 애써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렇게 저는, 어쩌면 가까운 사람들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도 한동안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거죠.
스무 살이어서 더 와 닿았을 것 같아요.
어느 날 학원 화장실에서 누군가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래였어요. (울음) 제가 고3이었을 때 1학년이던 후배들은 2학년이 되어 수학여행을 갔고, 제가 졸업한 학교의 후배들도 그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안산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 소식은 제게 더 크게, 더 가깝게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학원 분위기는 ‘동요하면 안 된다‘, ‘수험생이니까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쪽이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 분위기는 우리에게서 슬퍼할 권리를 빼앗아 간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학원에서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을 들은 셈이었어요.
소식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와 친구들은 수업이 끝난 밤 10시가 되어서야 전화를 받거나 뉴스를 보고서야 상황을 알았고, 그제야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민폐를 끼치기 싫다며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요.
그 무렵 아버지가 세월호참사 수습팀에 발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사실은 제게 또 하나의 복잡한 감정을 남겼어요. 그럼에도 당시 저는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대학 한 번 잘 가 보겠다‘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지금도 제게는 큰 아픔으로 남아 있어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어쩌면 죄책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월호참사는 제게 또 하나의 기억을 남겼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독립된 성인으로서 무언가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기억입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광장에 나갔는데요.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정치 참여라는 것을 처음 해 본 순간이었어요.
※첫 번째 질문이었지만, 남아름 감독은 그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남아름 감독의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이었고, 세월호참사 당시 해수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 내용이 다큐 <애국소녀>에서 다뤄지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애국소녀>라는 다큐멘터리가 탄생한 것 같네요. 4·16재단 문화콘텐츠 공모전을 통해 4·16재단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사실 저는 〈애국소녀〉라는 작품을 만들 때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386 민주화 세대의 자녀 세대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라는 주제 자체가 워낙 포괄적이기도 했고, 그 안에서 제게 가장 중요했던 한 부분이 바로 세월호참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 이 작품을 기획할 때는 세월호 이야기를 절대 넣지 않으려고 했어요. 우리 가족의 이야기와 한국 현대사를 연결하는 것이 이 다큐의 가장 중요한 축이었는데, 2014년 당시 아버지가 해수부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그때는요.
이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의도치 않은 상처가 될 수도 있고, 기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우리 아버지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공무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유가족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은 내가 만든 다큐가 공무원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과 여러 감정이 계속 부딪혔어요.
하지만, 이 딜레마를 우리 부모님 세대와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4·16재단 공모전에 참여한 제 마음은, 어쩌면 ‘확인받고 싶다‘라는 말에 더 가까웠어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그 질문에 대한 허락을 받고 싶었던 거죠.
4·16재단은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고,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있는 곳이니까, 설령 공모전에 떨어지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피드백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그 공모전은 꼭 지원금을 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건네는 하나의 편지였던 것 같아요.
※남아름 감독은 2022년 진행한 ‘제4회 4·16재단 문화콘텐츠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용기 내주셔서 감사해요. 공모전을 통해 만나게 된 4·16재단의 활동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제가 보는 4·16재단은, 참사 유가족과 피해 당사자들, 그리고 그 마음에 함께하는 시민들, 또 현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역할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괜찮다‘라고, ‘해도 된다‘라고 말해 준다면, 나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고 간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았어요. 그만큼의 신뢰가 있는 곳이에요.
다큐 〈애국소녀〉는 사실 ‘지각한 사람‘이 만든 작품입니다. 저는 세월호참사 초기 광장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도 열심히 참여하지 못했어요. 뒤늦게 와서 이야기를 꺼낸 셈이죠. 그래서 이 작품은, 어쩌면 제게는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비록 지각했더라도, 늦게라도 참여하고, 이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바로 그런 역할을 4·16재단이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참사 직후에는 추모의 열기가 컸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제 지겹다‘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을 고민하고, 기억을 이어 가는 곳. 그리고 지각한 사람인 저를 맞아 주는 곳이 바로 4·16재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의 수호자 캠페인에 후원으로 동참해 주셨어요. 어떤 마음으로 참여했는지 궁금해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공모전에 시나리오를 내면서 저는 ‘허락받고 싶다‘라는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덜컥 대상을 주셔서, 처음에는 이 상을 내가 받아도 될까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4·16재단 공모전을 통해 받은 지원은 제게 너무 큰 의미였어요. 제가 다큐멘터리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용기였고, 한 명의 감독으로서 지속할 수 있게 해 준 큰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 한편에 ‘언젠가는 꼭 갚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 영화로 수익이 생긴다면, 반드시 4·16재단에 후원해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감사하게도 〈애국소녀〉가 상을 받게 되고 해외에도 소개되면서, 적자가 아닌 상황이 되었고, 후원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제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세월호를 타고 있던 고등학생일 수도 있었고, 이태원 참사 때도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참사라는 것은 함께 책임져야 할 의무와 역할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세월호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의 수호자에 함께하고 싶었던 것은, 후원이기 이전에 제 몫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감당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어요.
‘기억의 수호자’ 캠페인의 의미를 잘 알아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해요. 진행 중인 캠페인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도 궁금해요.
사실 저는 변영주 감독님 팬이에요. 기억의 수호자 관련 감독님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참여하라‘고 하시는데, 그걸 보자마자 ‘아, 그럼 해야지‘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웃음)
또 박래군 선생님 인터뷰도 인상 깊었어요. 후원자 중 97년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스토리가 제 마음을 많이 움직였어요. 저 역시 지금을 살아가는 세대로서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최근 계엄을 겪으면서 엄마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너한테 또 다른 ‘광주‘를 보여주게 돼서 미안하다. 또다시 역사를 반복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라고요. 그런데 저는 엄마에게 왜 미안해하냐고, 이제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같이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고, 내가 이 시간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해서 나중에 다음 세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요.
엄마의 세대가 광주의 기억으로 1987년에 무언가 행동했고, 그 기억을 지금까지 전해왔던 것처럼, 저의 세대는 세월호참사 때 ‘가만히 있지 말자‘라는 그 기억이 계엄의 광장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이 우리가 응원봉을 들게 했고, 새로운 시대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믿어요.

‘기억의 수호자’ 캠페인으로 조성된 기금으로 재난을 겪은 청소년과 청년들을 응원하고 지원하고자 합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저는 생존 학생들, 그리고 형제자매와 친구들에게 먼저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냥 이렇게 지금 이 시간을 견뎌 줘서 고맙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줘서 고마워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맙다고 말하는 게 맞는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느껴요. 참사에 대한 기억을 통해 역사의 증인으로 남는 일은, 피해 당사자만의 몫이 아니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사에 대한 무거운 짐을 온전히 나눌 수는 없겠지만, 그 ‘바통‘을 여러 사람이 나눠 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우리가 조금씩 그 바통을 나누어 들다 보면,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연대에 자격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사자‘라는 것도 어쩌면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나도 어느 날 참사의 유가족이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일은 누구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시민들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찾아서 그 ‘바통‘을 나눠 가지다 보면, 누군가는 지쳐서 더 이상 활동을 못 할 때 뒤에서 지각한 사람이 이어서 받아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서로 이어 주다 보면 더 넓은 ‘광장‘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참사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듯,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도 결국 내 삶을 바꾸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바통을 함께 들고 뛰다 보면, 결국은 내 삶이 먼저 바뀐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이 바통의 무게도 사람들과 나누면 가벼운 깃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바통을 오래오래, 함께 들어 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억이 힘이 될 수 있도록 기억의 수호자가 되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