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김현] 병현에게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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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2025년 4월《월간 십육일》에서는 김현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병현에게>

지난 주말, 속초에서 열린 백스물다섯 번째 304낭독회에서* 병현이 읽어준 글을 다시금 생각 중이야. 그 글은 “동생이 죽었습니다…오랫동안 부르지 못한 이름을 오늘은 많이 부르려 합니다. 동생의 이름은 김병윤입니다.”라고 시작되지.

2013년 12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 병윤이 얘기는 끄억끄억 울면서 미안하다고 외치는 형의 모습으로, 거리를 데굴데굴 구르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어졌어. 그러니까 남겨진 사람들의 헤아릴 수 없는 비통함으로.

동생의 죽음에 관해 일기장 말고 어디에도 쓴 적 없다는,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다는 병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죽은 동생을 가슴에 숨겨두고(묻어둔 것이 아니라!) 떠올릴 때마다 정말 자신이 죽인 것 같아 미안하다는 고백 앞에서 내 고개도 절로 푹 꺾이더라. 병윤이의 죽음만큼이나 병현이의 삶도 참으로 애달팠겠구나 싶어서. 죽음을 헤아리던 마음이 산 사람에게 옮겨붙어 눈시울이 붉어졌지.

문득, 왜 여기일까? 어째서 죽음을 기억하려는 이들이 모인 자리일까? 병현은 이 낭독회가 쉬이 말할 수 없던 죽음을 얘기하기에 안전한 곳이라 여긴 걸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라면 동생의 죽음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이 함께 슬퍼해 줄 거라 믿었던 걸까?

그 믿음에 대하여 나는 지금도 생각해.

“오늘 나는 고백과 추모를 하고 싶습니다.” 병현의 개인적 고백은 끝내 이렇게 넓게 퍼져 나갔지. “세월호 아이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건 세월이 지나도 추모하고 기억하는 이들의 목소리 덕분이겠지요.”

304낭독회를 시작하며 매번 읽는 글에 적힌 이런 문장들을 또 한 번 새겨보게 되더라.

“죽은 사람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산 사람의 존엄 역시 위태롭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존중과 애도로 이어질 때, 삶이 온전히 삶일 수 있고 죽음 또한 온전히 죽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소리로, 산 자의 목소리로, 병윤이를, 죽은 자를 그려보고자 낭독을 마음먹었다는 병윤의 말에 담긴 거친 숨과 뜨거운 기운이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곱씹게 되더라.

나와 병현은 시인과 독자로 만나 두어 번 본 게 전부인데, 지금껏 서로를 선생님, 시인님이라 부르며 존대하던 사이인데 그랬던 우리가 그날 속초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형, 동생이 된 건 무슨 인과관계 때문일까?

병윤이. 병윤이. 병윤이.
병현이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다는 이름을 처음으로, 여러 번 불러봤어.
신기한 일이지.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을 뿐인데 어느새 병윤이가 가까이 와 앉는 기분이 들더라. 천사가 있고 천사에게 힘이 있다면, 그 힘의 원천은 산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 힘으로 천사는 산 자의 곁으로 오는 것이 아닐까. 그 믿음으로 우리는 손을 맞잡고 죽음을 에워싸는 것이 아닐까.

오늘 아침
병현이 보내온 온라인 메시지를 몇 번씩 여닫으며 읽었어.

“형, 거기도 봄 햇살이 따스하지? 지난 주말 함께 울어주어서 고마웠어. 같이 노래 부르던 밤도 너무 좋았고 ㅎㅎ 앞으로 더 자주 만나. 나도 시 더 열심히 써볼게!”

그건 분명 병현이 현에게 보내온 것이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 그 명백한 사실이 달라지더라. 그 메시지가 병현이 병윤이가 되어 보내온, 현이 병현이가 되어 받은 편지 같았어. 오늘의 병현이라면 동생에게 살갑게 마음을 전했을 거라 여기며 답장을 써 보냈지. 함께 적진 못했지만, 이런 당부가 전해지길 바랐어.

병현아, 언제든 병윤이가 되고 싶을 땐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주렴.

2014년 4월, 병현은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며 “병윤아. 동생들 잘 돌봐줘. 따뜻하게 맞아줘. 꼭 안아줘.” 말했다지. 그 마음 씀씀이를 이제 나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해. 이제 더는 자신에게 크리스마스란 없다고 말하는 병현에게 크리스마스를 다시 돌려주고 싶어. 이런 기도를 대신하고 싶어.

병윤아, 형 잘 돌봐줄게.

떠난 이와 떠난 이를 잇고, 떠난 이와 남은 이를 잇고, 남은 이와 남은 이를 잇는 일이 누군가 오랫동안 부르지 못한 이름을 대신 불러 주는 일이고 또 그 이름이 되어 대답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거듭 새길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우리 함께 기쁨을 찾아가자. 내 동생 병현아.

2025년 3월 31일
전화카드 한 장을 떠올리며, 현이 형 보냄

 

*304낭독회.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고자 작가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낭독회. 2014년부터 현재까지 지속 중이다.

 

김현 (시인)

2009년 『작가세계』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 소설집 등을 펴냈다.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2014년 9월부터 시작된 ‘304낭독회’ 일꾼을 맡고 있다.

작품

시집 『장송행진곡』, 『호시절』, 소설집 『고스트 듀엣』, 산문집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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