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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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2026년 3월 《월간 십육일》에서는 편혜영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지향성 마이크의 없음 >
지난 해 11월, 순천에서 특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소리에 집중하며 순천만 일대를 산책하는 ‘사운드 워킹’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활동가인 순천의 서점지기가 둥글게 모인 참가자들에게 헤드셋과 지향성 마이크를 나눠 주었다. 지향성 마이크는 특정 방향의 소리를 받아들이고 다른 방향의 소리를 줄이는 장치로,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증폭되는 소리가 달라진다.
전원을 켜고 마이크를 아래쪽으로 내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낙엽 밟는 소리가 믿기 어려울 만큼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세를 조금만 바꾸어도 마른 나뭇잎이 밟아 으스러지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 찼다.
활동가는 경이로워 하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세 가지 종류의 소리를 설명해 주었다. 지오포니(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며 만들어내는 소리), 바이오포니(생명체의 소리), 앤스로포니(인간이 만들어낸 소리)에 대해서. 앤스로포니는 아파트 관리실의 안내음, 각종 차들이 경쟁하듯 내지르는 경적소리, 분주한 응급차량 소리,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같은 것으로 도시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리였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자연의 소리를 처음 들어본 사람들처럼 이곳저곳에 마이크를 들이댔다. 억새를 향해 마이크를 가까이 대면 바람에 흔들린 줄기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또렷했다. 아래쪽으로 마이크 방향을 바꾸면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 작은 돌이 밟히는 소리, 신발이 흙바닥에 맞닿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으로 마이크를 올려 보았더니 풀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던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새가 우짖는 소리가 선명했다. 활동가는 아침이었다면 더 다양한 새소리를 들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지만, 늦은 오후의 점잖은 지저귐만으로도 충분히 경이로웠다. 이전에는 그저 비슷하게만 들리던 새 소리가 또렷이 구분되어 들렸기 때문이다.
한참을 홀린 듯 마이크를 움직이며 소리 듣는 일에 몰두하다가 문득 헤드셋을 벗어 보았다. 순간 세상이 너무나 잠잠해졌다. 귓가를 채우던 소리가 일시에 사라진 낯선 침묵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억새는 흔들리고 새가 날아오르고 낙엽은 밟혔다. 그러나 지향성 마이크를 통해 듣던 때와는 달리 모든 소리가 낮고 희미했다. 나는 뜻밖의 정적에 잠시 충격을 받았다.
지향성 마이크는 내가 미처 인식하거나 구별하지 못한 존재들을 선명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방향이나 세기를 끊임없이 바꾸며 기척을 남기는 바람, 느리지만 꾸준하고 지속적인 지구의 움직임, 그에 따라 달라지는 물의 흐름과 유속, 서로 다른 새들의 울음소리와 날갯짓 같이 언제나 존재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지나치게 마련인 존재들을 일깨웠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음악 소리와 자동차 경적 소리, 각종 알림음에 다시금 둘러싸였다. 간혹 익숙한 소음 너머 다른 소리를 가늠해 보려 애쓰기도 했다. 새의 울음소리나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낮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 같은 것들을. 언제나 그러는 것은 아니고 뭔가를 써야 할 때면 그렇게나마 집중하는 시늉을 냈다.
어찌 보면 소설은 희미하고 나약한 존재를 향해 지향성 마이크를 들이대는 일과도 닮았다.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내면을 상상하는 일이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의 하나인데, 그 내면이라는 것은 어지간히 흐릿하기만 하다. 그럴 때면 그저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소리를 들려주던 지향성 마이크가 간절해진다. 지향성 마이크를 가졌을 때처럼 누군가의 목소리, 마음, 감정을 선명히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어진다. 물론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므로 그저 짐작할 뿐이고, 알 것 같은 마음과 도무지 모르겠는 마음의 낙차를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소설은 타인의 내면과 고통을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그 마음에 결코 닿지 못하는 글 쓰는 사람의 낙담을 담아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편혜영 (작가, 문예창작학과 교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지금의 삶이 힘들어 다른 삶으로 건너가려는 사람들”에 끌린다고 말하는 소설가 편혜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작품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소년이로』, 『어쩌면 스무 번』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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