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연 님] –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돕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돕고 있는 거예요

<‘재난 현장 속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 서지연 님

아이 셋 엄마예요. 동네 아이들 논술 선생님이기도 하고. 10년 전쯤인가, 몇몇 학부모들이 절 찾아왔어요. 교육청에 보내려고 진정서를 썼는데 논술 샘이 좀 봐달라고. 저희 아이는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동네 중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학교를 다니고 있더라고요. 중학교는 의무교육인데 들어보니 정당한 통학권 요구인 거예요. 아이들의 근거리 배정을 요구하며 학부모들이랑 같이 싸웠어요. 교육청 앞에서 꽹과리도 치고, 시의원이랑 국회의원도 찾아다니고. 그런데 외부에서는 오해를 하는 거죠. 여기가 좋은 학군처럼 여겨지면서 “너희 자녀만 좋은 학교 보내려고 그러냐”. 심지어 어떤 중학교 선생님은 사회 수업 시간에 지역 이기주의, 님비의 표상으로 우리 사례를 들었다고도 하고.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마을신문 같은 게 있었으면 어땠을까? 우리 주장도 알릴 수 있고,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도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기더라고요.

얼마 후에는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하자 관련 소송 얘기가 나왔어요. 경비원분들이 동의 서명을 받으러 다니셨는데 문제는 그분들도 정확한 내용은 잘 몰라요. 또 누구 하나 친절하게 내용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우선 다 찬성, 찬성. 설명회 가서 들어보니 이건 누가 봐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서명만 받고 추진을 해버려서 훗날 피해가 주민들한테 고스란히 돌아왔어요. 어리바리하다 훅 당한 느낌이라, 그때도 후회를 많이 했어요.

학부모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마을신문을 만들자, 이렇게 얘기가 됐어요. 제가 아는 주변 학부모들에게 문자를 보냈죠. “마을신문을 만들려고 하는데 같이 할 사람들 모여봅시다!” 처음엔 30분 정도 관심을 보이셨는데, 뭣도 모르고 이상과 원칙만 내세우니까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웃음) 결국 7명이 남았어요. 그때가 2012년도였는데 매일 아침마다 우리 집에서 모여서 차 마시고 회의하고 수다 떨고. 다른 곳은 어떻게 만드나 찾아도 보고 이야기도 듣고. 생각해보니 그때가 제일 재밌었던 것 같네요(웃음). 2013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마을신문을 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동네에 좀 더 관심이 생겼고, 자연스레 여러 공동체 활동을 시작했어요. 동대표도 하고, 마을 자치위원도 하고, 공동체 라디오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고요.

촛불이 제 삶의 일부가 됐어요

마을신문을 만들기 시작한 이듬해 세월호참사가 났어요. TV를 보다가 우연히 세월호 엄마, 아빠들을 경찰이 막고 있는 장면을 봤어요. 하얀 우비 입고 맨발로 청와대로 가겠다고 울부짖는 부모들을 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때 우리 아이가 고 3, 희생자들과 같은 또래다 보니 정말 남 일 같지 않았거든요. 그날 밤 동네 사람들한테 다 문자를 보냈어요.

“나 촛불 들 거니까 같이 하자!”

아직도 처음 촛불 들었던 날이 기억나는데 수원시 영통구청 옆에 조그만 광장이 있거든요. 30~40명 정도가 모여 촛불을 들었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이 되니까 반 토막, 그다음 날 또 반 토막.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은데 그때는 울 것만 같아 아무 말도 못하고 촛불만 들고 서 있었어요.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만 있었던 거죠. 사람들이 줄어드는 건 신경 쓰지 않았어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나는 혼자서라도 촛불을 들 거니까. 매일 같은 시간에 촛불을 들었는데 어느 날은 저하고 친구 한 명. 또 어느 날은 저하고 남편, 우리 애들, 이렇게 우리 가족만 서 있었어요. 그런 날들이 많아지니까 이게 맞나 싶었는데, 그즈음 특별법 서명운동이 시작됐어요. 촛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영통구청 앞에서 받다가, 장날이 되면 장서는 곳에 찾아가서 받고. 점심시간에는 회사원들이 많이 다니는 상가 앞에서 서명을 받았어요. 조그만 테이블 하나 들고 다니면서 정말 엄청 울면서 받았어요.

전 국민적 서명으로 특별법이 제정됐으니 이제 좀 되겠지 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잖아요? 안일하게 쉬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찔리는 거예요. 주변을 보니 수원에 칠보마을은 매달 16일에 촛불을 든대요. ‘아, 그래 저거다, 나도 저거라도 해야지.’ 그때부터 매월 16일 저녁 8시마다 촛불을 들고 있어요. 제 주변 사람들도 다 알아요. 약속 잡을 때면 자연스럽게 “아, 16일 날 저녁은 안 되겠네.”(웃음) 촛불이 제 삶의 일부가 된 거죠.

사실 끝까지 할 거야, 라고 다짐은 했어도 혼자였으면 못했을 거예요. 우리 남편 조익현 님이랑 동네 주민이신 백성일 님, 윤주환 님이 엄청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어요. 늘 꾸준히 오셔서 자리 채워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사람이 없으면 일반 주민들이 오셔서 얘기도 해주시고 힘을 주고 가세요. 세월호 가족분들도 와주시고, 지난 10월 촛불에는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이 함께해 주셨어요. 수원 지역에도 3명의 희생자가 계시거든요. 그렇게 아름아름 모이다 보니 9년간 꾸준히 촛불 광장을 지켜올 수 있었던 거죠.

기억에 남는 순간도 많아요. 인근에 효동초등학교는 전교생이 오카리나를 배우거든요. 참 좋은 학교다 그랬는데, 한 선생님이 학생들이랑 오카리나 연주를 하고 싶다면서 아이들이랑 같이 오신 거예요. 아이들이 오카리나를 불어주고, 희생자인 형, 누나들에게 쓴 편지를 낭독해주었는데 너무 감동이었어요. 사실 아이들을 위해서 이 촛불이 계속되는 건데, 아이들이 세월호를 기억해주고 마음에 새겨주는 것 같아 위로받는 느낌이었죠. 가족합창단을 꾸려서 공연도 했는데 멀리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신 분들도 계셨어요. 아이들이랑 같이 세월호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배우고 무대에 섰는데 그걸 또 다른 아이들이 본다, 생각만 해도 감동적인 일이 우리 촛불에서 일어난 거죠. 코로나 때는 모일 수가 없으니까 각자 부른 노래를 합쳐서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어요.

제일 후회되는 건, 우리 동네에 세월호로 동생을 잃은 누님이 사셨어요. 한참 특별법 서명 받을 때 누님한테 연락해서 같이 서명 받으러 다니자고 했어요. 함께 서명을 받는데 막 뭐라고 한마디씩 하고 가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때는 그러면 엄청 상처를 받아서 울고 그랬던 시절인데 누님은 어땠겠어요? 누님도 큰 상처를 받으셨고, 그다음부터 뵙지를 못했어요. 생각할수록 그게 너무 후회가 되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우리가 피해자들을 좀 더 보호했어야 했는데…….

수원에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데요

제가 대단하다고요? 무슨요. 우리 지역에 저보다 더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성균관대역에서 매주 피켓팅을 해 오신 남기업 님, 이선옥 님은 교회를 바꾸신 분이세요. 세월호참사 초기에 교회 신도 몇몇 분들이 예배 끝나고 매주 교회 앞에서 피켓을 들기 시작했는데 보수적인 교회라 장로님들이나 목사님이 부담스러워하셨대요. 그런데도 이분들이 계속 피켓을 드니까 목사님이 안산에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러 가신 거예요. 다녀오시곤 느끼는 바가 있으셨던지 그 뒤부터는 교회가 세월호를 품기 시작했어요. 교회 앞에서 세월호 전시회도 열고, 관련 간담회나 행사를 할 때 장소도 빌려주고. 목사님께서 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도 하시고.

영통에는 맹달 구민서님이 계신데 영통 노란리본공작소 활동을 정말 오랫동안 해오셨어요. 매주 모여서 노란리본 만들고 전국으로 나눔을 해오셨는데 지난 몇 년간 코로나와 리본 만들 공간이 없어서 좀 쉬셨어요. 처음에는 교회 카페 한쪽을 빌려서 하다가 목사님이 이제 그만하라고 해서 나오고, 주민 휴게 공간인 북카페에서 하다가 카페가 문을 닫으면서 갈 곳을 잃고. 그러다가 최근에 코로나도 완화되고 공간을 다시 찾아서 활동을 재기해보려고 노란리본을 접었던 분들에게 문자를 보냈대요. 다시 시작한다고, 같이 하자고. 그런데 아무도 답이 없더래요. 혼자면 어떡하지. 겁이 잔뜩 나서 모임 장소에 갔는데, 세상에 열심히 활동해왔던 멤버들이 모두 다 오셨다는 거예요. 엄청 감동이었다고. 수원뿐 아니라 전국에 이름도 없이 함께해 주시는 분들이 엄청 많아요.

수원여성회 노란리본공작소 공방장 최경자 님은 매주 회원들과 리본을 만들고 매월 1회 수원역에서 피켓팅과 리본나눔을 하세요. 코로나 때에도 줌으로 만나면서 리본을 만드셨으니 대단하시죠? 시비 거는 분들 꽤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꾸준히 하고 계세요.

또 수원에는 참사 초기부터 시민단체들이 모여 세월호 공동행동을 만들었어요. 대표이신 정종훈 목사님과 유주호 집행위원장님이 참사 초기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죠. 다산인권센터, 수원여성회 활동가분들도 다양한 활동을 해 오셨고요. 수원 416연대를 발족할 때는 동네 주민, 풀뿌리 단체들도 다 함께했어요. 지금은 뭘 해도 수원 416연대로 같이 모여서 하니까 외롭지가 않아요. 동네별로는 뭔가를 기획을 하거나 판을 벌리기가 쉽지 않은데 수원 416연대 차원에서 그걸 모아주고 역할 분담해서 하다 보니 너무 든든하고 좋아요.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10주기를 앞두고 고민이 됐죠. 그러다 최근에 촛불 멤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사실 우리 남편은 10주기를 기점으로 뭔가 다른 걸 찾아야 되지 않나 이런 고민을 했대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얘기를 해보니 계속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처음에 약속했던 게 가족들이 이제 됐어, 이제 우리는 오롯이 슬퍼할 수 있으니까 하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 얘기할 때까지 한다. 그게 우리가 처음에 했던 약속이었거든요. 근데 아직 그게 아니잖아요. 10주기라는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냐, 계속하는 거지. 이야기 결론이 그렇게 난 거예요. 우리 동네 촛불은 10주기 이후에도 계속되는 거죠.

문제는, 제 준비가 소홀하다는 거예요. 제가 최근에 동네에서 공동체라디오 방송국을 만들면서 너무 바빠졌거든요. 촛불을 너무 관성적으로 준비하고 있나, 반성이 돼요. 좀 더 열의를 가지고 시간을 들이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올 수도 있고, 더 의미 있는 활동도 할 수 있는데. 촛불 문화제만 1시간 하고 마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할 수 있을 텐데. 최근에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 서명을 받았거든요. 그것도 늘 있는 곳보다는 세월호 때처럼 가판대 들고 동네 장터에도 가고, 사람들 오가는 거리로 옮겨 다니면서 적극적으로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내내 마음에 걸리는 거죠. 내가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9년째 이걸 해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하니 정말 그렇게 여기고 안주하고 있는 거 아닌가? 고민이 되는 거죠.

촛불이, 노란리본이 그리고 시민들의 활동이 세월호 가족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의지처가 되길 바라고요. 하지만 제가 촛불을 들고, 우리가 활동을 계속하는 건 가족들을 위한 게 아니에요. 최근에도 이태원참사, 오송참사 등 사회적참사가 발생했잖아요. 우리 사회는 계속 위험하고, 불안해지고, 살기 힘들어지고.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고 바뀌었으면 좋겠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너무 나태한 거 아닌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데 뭔가 보탬이 되는 건가? 늘 질문하는데, 결론은 늘 같아요. 제가 조금 더 힘을 내야겠죠. 옆에 있는 분들 손 놓지 않으면서요.

주관 – 4·16재단 / 후원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 글 – 유해정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후원계좌]

226401-04-346585

(국민,416재단) 

 

[후원문자]

#25404160

(한건당 3,300원)

 

[후원ARS]

060-700-0416

(한통화 4,16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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