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나희덕] 이곳은 여전히 난파선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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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2023년 4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나희덕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이곳은 여전히 난파선 >

 

올해도 다이어리의 4월 16일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선명한 검은색 숫자들과 빨간색 숫자들 사이에서 16이라는 숫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 빈자리가 가슴에 뻥 뚫린 구멍처럼 더 아프게 느껴집니다. 세월호 참사 9주기가 가까워 오는데,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너무 긴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세월호는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4.16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무엇으로 메울 수 없는 기표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던 세월호가 어렵게 지상으로 끌어 올려졌지만, 녹슬어가는 세월호는 웅크린 짐승처럼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9년 동안 세월호와 관련해 제가 쓴 시들을 한 편씩 되짚어 봅니다. 우리의 집단기억을 시를 통해서나마 다시 헤아려보자는 의미도 있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 돌아보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시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진 모습으로 제 안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꽤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탄센의 노래」를 썼습니다. 시를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시야나 정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탄센이라는 옛 샤먼의 목소리를 빌어와 불렀던 진혼의 노래였지요. 세월호 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저에게는 아비를 구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비의 노래를 불렀던 탄센의 딸처럼 여겨졌습니다. 잘못 살아온 어른들의 탐욕과 거짓의 역사를 일깨우기 위해 어린 목숨들이 대신 희생된 것만 같았습니다. 사실의 재현이나 논리적 비판에 앞서 추모와 진혼이 먼저였습니다. “노래의 휘장은 찢겨지고 / 비에 젖은 잿더미만 창백하게 남아 있는 밤 / 불과 비도 / 어떤 노래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밤”을 그렇게 견뎌냈습니다.

「난파된 교실」에서는 세월호를 떠올리는 사물들과 기표들을 간신히 호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난파된 교실’은 오늘날의 교육 현장이나 사회의 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믿고 시키는 대로 앉아 아이들은 “주황색 구명조끼를 서로 입혀주며” 기다리고 있었지요. 누군가‘움직여라, 움직여라’말해 주었더라면 “그 교실이 거대한 무덤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파도에 둥둥 떠다니는 이름표와 가방들, / 산산조각 난 교실의 부유물들”만이 그 무덤의 잔해로 우리에게 돌아왔을 뿐입니다. 즐겁게 떠난 수학여행이 “죽음을 배우기 위해 떠난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세월호 참사를 반복하지 않는 근본적인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턱 저편의 말」은 생존 학생이 증인으로 나온 재판에서 그 현장의 목소리를 받아 적은 시입니다. 그 당시 광주에 살았던 저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상주 모임에 나갔고 재판을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2015년 1월 27일 열아홉 살의 증인 두 명이 법정에 앉아 있었습니다.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 업무상과실치사상 재판”에서 증인 A와 증인 B는 비교적 차분하게 그날의 상황을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방청석에서 그 증언을 듣고 있는 동안 제 귀와 마음은 들먹거리기 시작했고, 사고 당시 세월호 안에 함께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귀에 물이 들어가고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증언의 말들이 제 귀에는 들렸다 안 들렸다 했습니다. 이 시에서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수없이 끼어들고 출렁이는 말줄임표는 그래서입니다. 어린 증인들에게서 저는 “혀끝에서 맴돌다 삼켜지는 말. 귓속에서 웅웅거리다 사라지는 말. 먹먹한 물속의 말. 해초와 물고기들의 말. 앞이 보이지 않는 말. 암초에 부딪치는 순간 산산조각 난 말. 깨진 유리창의 말. 찢긴 커튼의 말. (중략) 뼛속 깊이 얼음이 박힌 말.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말. 감전된 말. 화상 입은 말. 타다 남은 말. 재의 말”을 들었습니다. 증언의 강력함과 증언의 불가능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아우슈비츠의 희생자이자 증언자였던 쁘리모 레비의 책을 읽다가 아우슈비츠와 세월호를 연관시켜서 쓴 시입니다.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증언자로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결국 그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구조된 자처럼 보였지만 결국 가라앉은 자들에게로 돌아간 것이지요. 그가 아우슈비츠를 ‘세계의 항문’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세월호를 삼킨 바다 역시 제게는 “지금도 시커먼 괄약근이 헐떡거리는 곳”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부표 하나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처럼 흔들리고 있”던 그날의 바다를 다시 떠올립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사이에서 /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과 /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 사이에서”고통스럽게 서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쓴 세월호 시편은 시집 『가능주의자』에 실려 있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입니다. 시인으로서 제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유가족이나 생존자의 잊혀져가는 목소리를 시 속에 담고 싶었습니다.

–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 우리 아이요.
– 이 차가운 바람 속에 언제까지 계시려고요?
– 주검이라도 기다려야지요.
– 이제는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텐데요.
– 그래도 여길 떠날 수는 없어요.
 제발, 아이 장례만이라도 치르고 싶어요.

이렇게 시작하는 시에는 구조를 도왔던 민간 잠수사의 목소리와 트럭 운전사의 목소리, 친구를 남겨둔 채 구조된 아이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 간절한 목소리들이 잊혀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의 마지막 두 줄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출근을 했다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것이 오늘 제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세월호 참사 9주기를 맞으면서 다시 기억의 신발 끈을 고쳐맵니다. 그리고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에 그 목소리를 불러옵니다.

세월호 이후,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어떤 난경을 통과하면서 시인들은 그 목소리와 함께 해왔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는, 2014년 4월 16일 이후 수정을 필요로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떤 부작용도 불사하며 말해야 하는 세상이 있다. 그 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어긋나고, 경청되지 않으며, 난데없는 악의적인 오독에 휩싸일지라도.”라는 김수이의 말처럼, 이러한 곤경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시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가장 무력하고도 강력한‘작용의 언어’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기억도 생각도 달라지겠지만, 그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바람만큼은 갈수록 간절해질 것입니다. 이 난파선 위에서 우리에게는 아직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 불러야 할 노래가 남아 있습니다.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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