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정보라] 나의 세월호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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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2024년 4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정보라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나의 세월호>

1월 18일에 세월호를 보러 목포신항에 다녀왔다. 2017년에 인양한 해부터 매년 한두 번씩 단체 참관이나 416가족협의회 행진에 참여했다. 목포신항만 앞 일반 시민들을 위한 임시건물에서 지역 시민단체 참가자들과 함께 참관 안내도 하고 리본도 만들었다. 2019년까지 3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갔는데,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2022년에는 갑자기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에 오르고 2023년에 전미도서상 후보가 되면서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느라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2년이 또 그냥 흘러 버렸다. 그 사이에 세월호의 모습은 유가족 부모님들 SNS에서나 가끔씩 보았다.

나와 남편이 목포신항에 도착한 날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미수습자 다섯 분의 사진을 모셔놓은 단 위에 빗방울이 떨어져 추모객들이 두고 간 음료수와 간식이 빗물에 흠뻑 젖었다. 신항만을 둘러싼 철망에 달린 수많은 노란리본은 색이 바랜 채 바람에 휘날렸다. 나는 그 노란 리본을 하나씩 묶던 날을 생각했다. 추모객과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지역 시민단체 분들로 북적이던 몇 년 전의 여름날과 달리 임시건물은 두 채 다 잠겨 있고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4년만에 처음 본 세월호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신분증을 제출하고 들어가서 보니 윗 갑판에 초록색 부착물을 덧대어 약간 달라진 모습이었다.

미수습자 수색이 최종 종료되던 날 현철이 아버님이 “미수습자 다섯 명을 잊지 말아달라”고 오열하시던 모습을 생각했다. 나는 그날 수업이 있어서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유튜브 화면으로만 보았다.

나는 잊지 않는다. 2학년 6반 남현철, 2학년 6반 박영인, 양승진 선생님, 권혁규 어린이, 혁규 아버님 권재근님.

2016년 8월 기억교실을 옮기던 날, 말이 좋아서 ‘옮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학교에서 쫓겨나던 날, 텅 비어버린 6반 교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현철이와 영인이 책상을 떠올렸다. 5반 중식이 어머님이 직장에 계시다가 뒤늦게 달려와 유품 상자를 끌어안고 “중식아! 중식아!” 하고 오열하시던 목소리가 복도와 계단에 울려퍼지던 것을 생각했다. 8반 봉석이 형님이 동생 책상을 직접 옮기려고 오셨는데 사진 속 봉석이 얼굴하고 너무 똑같아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깜짝 놀랐다. 2반 온유 책상을 옮기고 4반 요한이 책상을 옮겼다. 학교도 교육청도 아이들의 유품과 책상을 그저 교실에서 내쫓을 궁리만 했고 교육지원청 창고에는 제대로 유품과 책상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진동으로 유품이 상하지 않게 ‘특수 이사’를 한다는 트럭 옆면에 노란 리본도 없이 업체 이름만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교육청과 학교가 시켜서 간 수학여행에서 죽은 학생들, 통신사와 학교가 퍼뜨린 “전원 구조” 가짜뉴스에 전국민과 함께 속은 유가족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나는 유품과 책상을 창고에 놓고 돌아오면서 아이들을 다시 한 번 춥고 지저분한 곳에 가두고 버리고 도망치는 것 같아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2014년 추석날 국회 본청에서 농성장을 지키던 민석이 아버지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참혹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깨우면 일어날 것처럼 보얗고 깨끗하던 아이들. 그런데 손톱이 전부 다 부러지고 깨졌더라고 했다. 배에서 탈출하려고, 문을 열려고. 그런 아이들을 제대로 된 시신 안치소도 아니고 그냥 고무판 위에 죽 눕혀 놓았더라고. 민석이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하신 이야기.

2014년 여름에 광화문 농성장은 석쇠에 굽는 듯 뜨겁거나 아니면 비가 왔다. 유가족 부모님들이 노란 바람개비 날개마다 아이들 이름을 적어서 광화문 광장 화단에 꽂아두었다. 비가 오면 바람개비는 바람이 아니라 빗물을 맞으며 돌았다. 아이들이 추운 물속에서 그렇게 갔는데 아이들 이름이 적힌 바람개비까지 비에 얻어맞으며 속절없이 젖는 게 너무 속상했다. 그러나 비가 오면 서명대는 바빠졌다. 서명 하나하나가 소중했고, 서명지가 비를 맞아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면 낭패였다. 금속노조에서 서명대 파라솔을 마련해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농성장이 처음 생겼을 때는 땡볕이면 땡볕을 맞고 비가 오면 알아서 요령껏 비를 가리며 서명을 받았다. 유가족 아버님들이 단식하며 천천히 죽어가는 서명대 뒤편은 너무 참담해서 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세월호 거치장소로 들어가는 입구, 신분증을 제출하는 검문소 맞은편에 304분 희생자 사진이 있다. 아이들 얼굴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지성이, 수연이, 해화, 예은이, 건우…

물론 나는 아이들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유가족분들, 부모님들이다. 나는 자식 잃은 부모님들과 같이 행진하고 같이 눈과 비와 땡볕을 맞고 같이 경찰에 둘러싸였다. 국회에서 탄핵 의결되던 날 국회 앞에 말 그대로 ‘구름같이’ 모여든 군중 속에 세월호 유가족들도 함께 서서 “이겼다!”를 외쳤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미수습자 다섯 분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추모공원은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납골당 반대”한다는 무리의 욕설과 악다구니만 쌓여가고 있다.

남의 일이란, 예를 들면 남의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는 그런 게 남의 일이다. “전원구조”했다고 거짓말하더니 이후 며칠 동안 수백 명이 물지옥에 갇힌 채 죽어가는 모습을 전국민에게 생중계하는 걸 내 눈으로 목도했으면 그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세월호 10년은 내 인생의 10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실시간 생중계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기울어버린 배를 속절없이 바라보면서 화면 안으로 손을 뻗어 한 명이라도 구해내고 싶었던 그 수많은 시청자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물을 것이다.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유가족을 사찰하고 왜 정당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탄압했는지. 왜 국화꽃 들고 추모하려는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쏘았는지.

성역 없이 진실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하고, 추모할 권리를 보장하라. 투쟁.

정보라 (소설가)

어둡고 마술적인 이야기,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씨앗』으로 제1회 SF어워드 단편 부문 우수상을 받았고,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한국 최초로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작품

『저주토끼』, 『한밤의 시간표』, 『아무튼 데모』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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