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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임호경] 우연이 돛에게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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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경


2026년 9월 《월간 십육일》에서는 임호경 작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 우연이 돛에게 >

다시 이 물길에 떠 있다.

이제는 시간이 조금 지나 보름에 한 번씩, 세 달에 두 번씩 떠오르는 생각들
말들, 사진 같은 순간 모두

우주를 항해하고 있을 너에게 이 십몇 년이 또 그리 긴 시간 아니었겠지

“자이빙”*

벗이 있어 물질한다고, 나는 때로 뭘 하는 것보다 서로 부대껴서 너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좋았다.

바람을 등에 업고 갈 때, 모든 것이 우리를 돕고 안온하게만 잘 나아가는 것 같을 때
그때가 제법 위험한 구간일 수 있는지 처음엔 잘 몰랐어.

세 계절이 지나고

이 땅에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서로 중심의 무게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조금 알게 될 때쯤

우릴 밀어주는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그와 함께 가고 있다면 이 바람 느낄 수 없다고.*

바다엔 답이 없고 바람은 끊임없이 맞는 말을 수정하고

다시 또 “무게중심!”*

이것을 말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조금 이동했다.

센 바람 못 느끼는 우릴 보는 섬들은 알았겠지?
바위는 들었겠지. 우연과 돛을 밀어주는 바람의 피부를, 살결을

한 번도 그렇게 세게 당겨본 적 없는, 잡아본 적 없는 팔뚝과 힘들.

내 화. 답답했던 일 모두 합친 것, 오만 배도 더 거대했던 화들.
물들, 짠 물들 바다에 뿌린 덜 짜게 짠 물들.

바람에 연을 계속 떠 있게 하듯이
너를 둘러싼 돛이 우연히 이 바람을 맞듯이

결국 우리는 더 큰 배를 타고 가고 있는 것이라고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바람으로 불고 있다고

말랑말랑 아침을 기억할게.

그날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낄게.

바람 얼마 떠?

“16 노트요”

이 바람 왜 지금 이 방향일까. 왜 오늘 조류는 자꾸 남으로, 남쪽으로 흐를까. 이렇게 흘러 내가 그리 건너간다면
이건 우연히 간 걸까.

우연으로 만나야 좋아. 그대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듯

공기의 빈자리, 부피와 촉감과 밀도를 알게 하는 허공이 움직인다.
에테르 바다에 나를 불어주는, 볼을, 배를, 목울대 맘 눌러주는*

“태킹!”*

멀리 시커먼 구름 무리가 있어. 보여. 그 너머에 우리 갈 땅덩이 있어.
지나가자마자 맞자 흠씬 젖자 비에 녹아 흘러 미끌리며 통과하는 흰 기억.
안전해졌으면 네 방울씩 모은 인연 시절 노력

그러나 “태킹!”

존재하지 않는 돛단배의 항해.
이 항해가 끝나면, 나와 또 너를 기억하는 마을의 사람들 모두
우리를 둘러싼 배의 모양으로
세상의 관객이 될게.
이 배의 배우가 될게.

*자이빙
바람을 등지고 항해하는 돛단배가 방향을 바꾸기 위해 돛을 반대편으로 넘기며 진로를 전환하는 행위.
바람이 강할 때는 돛을 지탱하고 있는 붐이 빠르고 강하게 넘어가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붐에 머리나 몸을 부딪혀 다치지 않도록 “머리!”, “붐!”이라 외치며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의 안전을 서로 챙겨준다.

*뵌바람 (Apparent Wind)
움직이고 있는 배나 사람이 느끼는 체감 바람. 실제 불고 있는 바람과 다르다.
만일 바람의 방향이 원하는 목적지와 정확하게 같은 순풍이 불어오는 경우, 배는 바람의 힘을 온전히 받아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바람의 속도와 배의 속도가 같은 방향으로 일치하므로, 항해자는 배를 밀어주는 거센 바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함께 이동하며 오히려 고요한 공기 속에 있게 된다.

*무게중심 (하이크 아웃 / Hike out)
바람이 돛을 밀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때, 사람이 반대편 배 바깥으로 몸을 내밀어 자신의 무게로 배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는 것. 돛단배 항해에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배의 난간에 옹기종기 앉아, 기울어지는 반대 방향으로 배의 중심을 잡는다. 기울어지는 반대편을 눌러주는 사람들의 무게가 더 묵직하게 실릴수록, 배는 강한 바람에서도 더 빠른 속도와 안정적인 항해를 할 수 있다.

*에테르
고대 철학에서 지상에 있는 공기의 존재에 상응하여, 하늘과 우주를 채우고 있다고 여겨진 천상의 물질. 지상의 네 원소(물, 불, 공기, 흙)와 구별되는 제5의 원소로서 천체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근대 물리학에서 빛이 우주 공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매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따라,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는 가상의 물질을 에테르라고 불렀다. 빛의 전파를 설명하기 위한 물리학적 개념으로 널리 논의되었으나, 여러 실험에서 그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고, 현대 물리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개념이 되었다. 에테르는 오랫동안 인간이 볼 수 없는 공간을 무엇인가가 채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태킹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거슬러 항해하는 돛단배가 방향을 바꾸기 위해 돛을 반대편으로 넘겨 진로를 전환하는 행위.

돛단배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의 정면을 향해서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바람과 일정한 각도를 이루며 좌우로 방향을 바꾸어 지그재그로 항해한다.
한 번 방향을 바꾼다고 목적지에 바로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을 받아 다시 방향을 바꾸고 또 바꾸어가며 진로와 전환의 횟수를 고민한다.

이 태킹을 통하여 배는 거센 맞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도 각도를 틀어가며 나아갈 수 있다.

추신.

배를 타며 어떤 항해를 떠올렸습니다.

돛단배를 타며 가고자 하는 곳으로 한 번에 손쉽게만 갈 수는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방향을 바꾸고 또다시 바꾸니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늘 변합니다. 우연이 돛에게 불어준 말들로 배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임호경 (작가)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퍼포먼스, 설치, 텍스트 작업을 수행한다.
작가는 시(詩), 서(書), 화(畫)가 분화되기 이전의 예술을 상상하며 다원예술적 관점에서 즉흥과
대상이 혼합된 속성의 작업을 진행해 왔다. ‘x = ~x’라는 모순된 명제를 일상적 행동 양식과
특정 사물들에 대입해 보는 행위를 지속하며, 항해하고 있다.

주요 작품
시집 『강릉호시절』, 공연 <없는 항해>, 공연 <무이유 꼴라쥬>, 개인전 <SEOUL 천사의 詩>,
단체전 <2023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서유록>, 희곡 <길 떠나는 고목>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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