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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김민섭] 평범한 일상을 정확한 세월로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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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섭


2026년 1월 《월간 십육일》에서는 김민섭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정확한 세월로>

몇 년 전엔 신용카드로 물건을 살 때면 소액이더라도 서명을 해야 했다. 편의점에서 과자를 한 봉지 사더라도 그랬다. 전자펜을 잡고 액정화면에 이름을 쓰거나 싸인을 했다. 그런데 그게 형식적인 일이어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수고하세요 하고 점원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주로 선을 일자로 성의 없이 긋거나 점을 하나 찍거나 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 바뀌었다. 아마도 2016년 즈음이었다. 리본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한두 번 그렇게 하고 나니까 왠지 계속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매번 그렇게 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이나 리본을 그려 나가게 됐다. 어느 날 친구와 옷을 사러 갔을 때 나는 옷을 한 벌 사고 예의 그 리본을 그렸다. 옷 가게에서는 점원과 손님의 대화가 일어나는 일이 많다. 점원이 옷을 포장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서명이 특이한데 혹시 의미가 있는 겁니까. 지켜보던 친구가 말했다. 의미는 무슨, 그냥 성의가 없는 거죠. 웃고 있는 두 사람에게 멋쩍게 말했다. 저어, 그게, 추모의 의미입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웃음을 거두었다. 아주 잠시 그 시간이 멈췄다. 누구도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분위기. 점원은 포장된 옷을 나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저도 앞으로 이 서명을 사용하겠습니다.’ 옆에서 친구가 자신도 그러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없어질 리본을 계속 그려나가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중에는 내가 추모하기 위해 그런 행위를 반복한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수만 번의 세월이 어딘가에 전송되었을 것이다. 언젠가의 나는 거창하고 티가 나는 일들만이 의미를 가진다고 믿었다. 제도와 구조의 변화를 위해 정의롭게 투쟁하는 것을 동경했고 내가 쓰는 글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그 증거까지 길이 남길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건 어렵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다만 더욱 중요한 건 개개인이 가지는 일상의 태도가 아닐까. 나의 수고로움과 노력을 더하고 소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보다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수만 번씩 같은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의식적으로 반복해 나아가며 우리는 조금 더 거기에 가까워진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타고 도약하는 게 아니라 나의 발걸음으로 조금씩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한 인간을 이전과는 돌이킬 수 없는 단단한 지점으로 이끈다.

이제는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더라도 전자서명을 요구하는 일이 줄었다. 5만원 이상의 고액을 구매할 때 그렇게 되는 듯하다. 그래서 서명하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아진다. 대신 요즘은 누군가에게 서명을 해 줄 때마다 리본을 그려가고 있다. 강의가 끝나고 서명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1년에 1만여 명에게 서명을 해 주는 것 같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리본을 수만 번씩 그려가고 있는 셈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서명을 요청하면서 ‘저도 리본 그려 주세요.’ 하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도 서명할 때 이거 그려도 돼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아니 저한테 허락을 왜 받아요 하고 싶으면 하시면 되죠 앞으로 함께 그려요, 하고 답한다. 그런 그들이 고맙고 애틋하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리본을 그린 사람이라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많은 리본을 그려갈 사람일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세월을 쌓아가는 일이면서 기억해야 할 당신의 세월을 곁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리본을 많이 그렸다는 게 자랑은 아니겠으나 그렇게 하나의 세월이 어디론가 전송될 때마다 나도 내 삶의 정확한 방향으로 가까워질 것을 믿는다. 나의 아무것 아닌 다른 평범한 일상들도 그렇게 만들어 가고프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김민섭 (작가, 인문학 강사)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통해 대학 바깥의 현실과 경계인의 시선을 사회에 건넸다. 이후 책과 글, 강의를 넘나들며 ‘김민섭’이라는 고유한 장르를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는 강릉에서 ‘당신의 강릉’이라는 작은 서점을 운영 중이다.

주요 작품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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