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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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새
2025년 8월 《월간 십육일》에서는 박참새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나는 거의 물이다> *
그리고 나는 거의 기억이 없다.
복도. 긴 복도. 기숙사 복도였던 것 같다. 내 방은 그것의 끝에 있었으므로 나는 나 있는 길의 마지막까지는 내내 걸어가야 했다. 나는 너무 컸다. 너무 무겁고 너무 느렸다. 그 짧은 길이 속수무책이었다. 오로지 길만 나 있으며 빛이 없는, 양쪽으로 나란히 위치한 작은 방들이 꼭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이 방 안에 내 친구들이 있다. 이 방 안에 있는 애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나는 아직 그 방 밖이지만 나 역시도 곧 들어가야만 한다. 아직도 복도를 걷고 있다. 그렇게 내내 걸을 길이 아닌데도 나는 정말 아직도 걷고 있다. 너무 무겁고 너무 흐른다. 이 복도는 꼭 다른 복도인 것만 같다. 양옆의 방들도 다른 곳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거의 물이라면. 걷다가 이 복도에서 거의 물과 다름 아닌 것이 된다면. 이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기억이다. 그날, 여기에 있었지만 마치 없었던 것처럼 나는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 듯이. 마치 유령처럼. 그리고 나는 이렇게 쓴다, 왜 내가 아니야?
*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제는 쓰고 싶은 것 혹은 써야 하는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과의 싸움뿐이라고. 피하려면 평생도 피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방향을 틀다 보면 결국 막다른 곳에 도착한다. 막힌 채로도 살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다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대단히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소리치는 대신 또 속삭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무언가를 한다. 이를테면 그들이 망원역에 있을 때마다 지나치지 않기. 눈을 마주치고 열쇠고리를 받아오고 기꺼이 내 진짜 이름을 적기.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없다. 나는 또 너무 무겁고 너무 느린, 걸음마다 물자국이 남는 자박한 사람이 된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도 못한다 혹시 나쁜 인사가 될까 봐. 저 열쇠고리가 빠르게 소진돼서 각자의 집으로 모두 돌아갔으면 좋겠다, 가서 밥도 먹고 몸도 누이고 그렇게 오늘 하루가 잘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말을 속으로만 또 할 뿐이다. 그렇게 받아온 작은 고리들이 집에 참 많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또 자꾸 묻게 되지만
그렇지만 기꺼이 목소리를 빌려주고
싸우듯이 무언가를 쓰고
304개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그러면 조금씩 잦아질지도 몰라 그리고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기억하는 방법을 재건하는 것
그 복도를 다시 걸을 수도 있겠지, 나만 멀쩡히 바깥의 삶의 즐기고 있을 때 내 친구들 그러니까 고작 열아홉 스물이던 애들이 이 복도에 있었을 거란 생각 대신에 그 복도를 걸으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죽은 자는 우리 마음에서 죽어야만 죽은 거다 **, 그러면 나는 아직도 거의 물이지만 물인 채로 유영할 수도 있겠지, 온갖 것을 다 품고 다 안은 채로 내가 가라앉고 무언가를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조금씩 달라지겠지 내 목소리도 내 생각도 내 글도……. 바라기만 할 뿐이다. 다만 바라기만 해도 충분한 것이 있길 바라면서.
*
매달 중순 즘이면 낭독회 소식을 알리는 메일이 온다. 숫자가 차곡히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낀다. 다행이라는 감정이기도 하겠고, 미안함이 있기도 하겠지. 소식지에 적힌 이름들을 본다. 낯선 이름도 익숙한 이름도 모두 반갑다. 그들에게 물어본 적 없지만 혼자서 내 몫의 영혼을 의탁한다. 무사히 하루가 가길, 목소리들이 켜켜이 쌓이길. 그래서 다음 달에도 또 이 메일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불러준다면, 부른다면, 이렇게나 언제고 모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더 바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름의 목록이 더이상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무자비하게 길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살아 있는 게 살아 남은 것으로 치부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삶은 요행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곳곳에 닥치고 동시에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이상한 무감각이 더 이상 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바라는 것 말고, 무언가를 무릅쓴 채로 어디론가 나가야 한다는 것 말고, 그리고 이렇게 쓰는 것 말고… 한참을 쓰면서 생각한다. 20대를 함께 통과해 오면서 쓰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 것에 대해서. 그렇지만 또 마침표를 쓰고 그다음 문장을 골몰하면서. 나는 언제나 그 복도를 걷고 있다.
| * 김행숙, ⌜당신의 악몽1⌟ (『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
나는 거대한 여자다. 인간적인 차원의 부피가 아니다. 나는 거의 물이다. 내게 기댄다면 나는 잠시 튜브다. ** 마리즈 콩데 (『나, 티투바, 세일럼의 마녀』, 은행나무, 2019) |
박참새 (시인)
스스로를 ‘글쓰기 노동자’라 칭하며, 다양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2023년 제42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첫 시집 <정신머리>를 출간했다.
작품
시집 『정신머리』, 대담집 『출발선 뒤의 초조함』, 『시인들』, 산문집 『탁월하게 서글픈 자의식』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