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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진은영] 내가 가장 오래 기다려야 하는 사람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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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2025년 10월 《월간 십육일》에서는 진은영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내가 가장 오래 기다려야 하는 사람>

1.

깊은 우물이 하는 체험은 하나같이 느리다.
무엇이 그 깊은 곳에 떨어졌는지를 알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 그저 변화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누구나 기다림을 철저히 배워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깊은 우물의 비유를 통해 기다림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물이 깊을수록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내는 소리는 한참 뒤에 들리기 마련이니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니체가 쓴 책의 가장 유명한 등장인물인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라고 독백한다.

참된 소유물은 항상 그것을 소유한 사람 안에 깊숙이 감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보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늦게 발굴된다. 우리가 태어난 순간 세상은 우리가 이러저러한 여자아이나 사내아이로 자라길 바라며 묵직한 말과 가치를 요람 속에 넣어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으로 서는 법, 나 자신으로 걷고 달리는 법, 도약하는 법, 춤추는 법을 도무지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오래 기다려줘야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게 니체의 생각이다.

원하는 것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대형 매장에 가서 완제품을 집어 들어 재빠르게 카트에 넣는 일과는 다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찾는 일과 계획을 세우는 일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들 새해 첫날이면 해봐서 알겠지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일은 즐겁고 달콤하다. 니체는 “평생 계획을 세우는 사람밖에 되지 못할 역량만을 가진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아무도 행복 속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다는 데 있다. 계획 세우기를 멈추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하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때 우리가 좌절과 환멸에 빠지는 일이 생기고야 만다.

포스트잇에 좋아하는 것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과 달리, 어떤 일이든 직접 해보면 쉽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획한 일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데도 계속하고 싶은 일이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인 경우가 많다. 결과는 신통치 않고 주위 사람들은 그 일에 매달리는 나를 걱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보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일을 찾아야 한다.

처음에 나는 한 유명 영화감독을 예로 들며 그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렸는지, 답답하고 꽉 막혔다는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지 덧붙이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했다. 글의 결론은 내가 가장 오래 기다려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써놓은 원고를 한참 들여다본 후에 나는 한 가지가 빠져 있음을 알았다. 그건 기다림에 깃든 절실함에 관한 것이었다.

2.

세월호 10주기 특집 신문기사에서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이 가장 바라는 일은 아이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라는 내용을 읽고 통증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10년이면 슬픔과 기다림에도 끝이 있을지 모른다고 무심결에 생각했던 것 같다. 미국의 작가 조앤 디디온을 언급하며 이 행성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도 죽은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마리아 투마킨의 글을 읽었는데도 그랬다. 디디온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구두를 절대 버리지 못했는데, 언젠가 돌아올 남편이 신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 만들어낸 슬픔의 깊이는 그 상실을 경험한 사람의 평생의 길이와 같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슬픔의 돌이 깊은 우물 바닥까지 가라앉으려면 평생이 걸릴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테니까. 이 길고 긴 기다림의 진실에 말문이 막혔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가장 오래 기다리게 될 사람은 내가 사랑했지만 상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가장 오래 기다려야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 있냐고, 아직도 슬픔에 빠져 있냐고 묻는 이들을 만나면 이 슬픔과 기다림의 깊이에 관해 다시 말해주어야 한다.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서 우리도 조금씩 애써보자고 말해야 한다. 지난 11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이 계속된 사회적 참사의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위해 한결같이 애쓸 수 있었던 힘은 그 절실한 기다림에서 비롯되었다.

진은영 (시인)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고, ‘저항’하는 사람들에 관해 시를 써왔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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