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세월호가 침몰한 그날, 300여 명의 희생자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바다에 뛰어든 이들이 있다. 바로 25명의 민간잠수사들이다. 오늘은 6월 17일, 고(故) 김관홍 잠수사의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고(故) 김관홍 잠수사를 비롯한 25명의 민간잠수사들의 헌신과, 그 이후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이 감내해 온 지난한 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이날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스테이션 사람 지하 1층 사람홀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 <로그북> 상영회와 4·16민간잠수사 간담회가 진행됐다. 행사는 416민간잠수회와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4•16재단, 4월 16일의 약속국민연대, 세월호를 기억하는 은평사람들의 모임이 공동 주최하였으며 안산마을건강센터에서 지원하였다.
행사 시작 시간인 오후 6시 30분이 되며 4.16연대 김선우 사무처장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김 사무처장은 이날 오전 백제 추모공원에서 많은 시민들이 함께하는 가운데 고(故) 김관홍 잠수사의 10주기 추모식이 진행되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자리 역시 “뒷일을 부탁한다며 먼저 우리 곁을 떠난 김관홍 잠수사가 부탁했던 그 약속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자리”이자, “국가가 마땅히 해야 될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곳에 가서 역할을 수행한 민간잠수사들의 노고를 함께 이야기해 보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곧이어 영화 상영이 시작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로그북>은 세월호참사 당시 희생자 수습을 위해 두 달간 자원봉사로 바다에 들어갔던 민간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속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상은 복진오 감독이 세월호참사 직후 구조·수색 현장인 바지선에 직접 승선해 촬영한 기록물이다. 여기에 시간이 흐른 뒤 한 민간잠수사가 건넨 잠수 일지 '로그북'과 민간잠수사들의 인터뷰를 더해 참혹했던 당시의 현장과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냈다.
이 기사를 보고 있을 모든 분들이 영화 <로그북>을 한 번쯤 만나보기를 바란다. 진실은 수많은 왜곡과 오해, 세상에 떠도는 부산물들 속에서 쉽게 흐려지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
약 2시간의 영화 상영이 끝난 뒤, 4.16민간잠수사 간담회가 이어졌다. 간담회는 2학년 5반 고(故) 이창현 군의 어머니이자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부서장 최순화 님의 인사말로 시작됐다.
최순화 대외협력부서장은 “21년도에 나왔을 때(영화가 개봉했을 때)는 보지 못했다”며 “12년이 지나 <로그북>을 본다는 것은 세월호참사의 가장 처참한 현장으로 같이 들어가는 것 같다”고 가슴 아픈 심정을 밝혔다. 이어 "우리 아이들을 비롯한 292명 한 명 한 명을 안고 나오며 그분들이 느꼈을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됐다"며 "부모로서 아이와 온전히 이별할 수 있도록 해주신 민간잠수사분들께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백 번, 천 번이라도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세월호참사 민간잠수사들을 향한 미안함과 안타까움도 전했다. 최 부서장은 “한결같이 아프시고, 과거 산업잠수사로서 잘해오던 일을 이어가지 못한 채 다른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며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개선하지 못한 국가가 원망스럽고 속상하다”고 말했다. 이어 “12년을 잘 버텨주신 (민간잠수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은평 사람들의 모임’ 이서윤 님의 사회로 진행된 간담회에는 앞서 소개한 25명의 민간잠수사 중 한 명인 김상우 잠수사와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영화 <로그북>을 제작한 복진오 감독이 함께했다. 당사자들의 진솔하고 꾸밈없는 증언인 만큼 주요 질문과 답변을 가능한 한 원문에 가깝게 기록하고자 한다.
– 먼저 김상우 잠수사에게 세월호참사 직후 팽목항으로 향하게 된 계기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Q.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팽목항으로 달려가 바닷속에 뛰어드셨는데, 그 결정의 순간과 당시의 마음을 기억하시나요?
A. (김상우 잠수사) 당시 4월 19일부터 민간잠수사들이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에 먼저 가 있던 군대 후배가 있었는데, 조심하라고 그곳이 위험한 곳이라고 말해주기 위해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잘 안됐어요. 그러다가 20일에 통화를 하게 됐는데 사람이 너무 부족하다고. 경험 있는 잠수사들이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위험하다 보니 이걸 할 만한 잠수사들이 별로 없어서 형이 좀 와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간 전광근 잠수사한테 그 얘기를 듣고 그날 바로 짐을 챙겨서 22일에 현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 당시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수도는 ‘바다로 치면 히말라야’로 불릴 만큼 위험한 해역이었다. 김상우 잠수사는 당시 민간잠수사들이 얼마나 극한의 환경 속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자 수습 작업에 나섰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Q.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바닷속이 굉장히 어둡고 잘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그날 바닷속에서 마주했던 상황은 어땠나요?
A. (김상우 잠수사) 잠수했던 모든 내용을 다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조류가 가장 세다고 말하는 1~2위 정도 되는 곳입니다. 조류가 세다는 건 홍수가 난 강물처럼 (물살이 빠르게) 싹 지나갑니다. 몸이 떠내려갈 정도로. 물이 서는 시간을 ‘정조‘라고 하는데 딱 4번입니다. 한 2시간 정도 물이 서요. 실제 우리 잠수사들이 투입해서 한 명당 30분 정도로 4명씩 잠수할 수 있죠.
그렇게 잠수를 하면 시야가 4월에는 10~20cm 정도, 5월에는 30~40cm 정도, 6월이 되면서 여름에 가까워지면 1m까지 좋아지는데 그건 세월호 격실 밖의 이야깁니다. 격실 안에 들어가면 불을 끄면 깜깜하듯이 그냥 깜깜합니다. 저희는 세월호 격실 안에서 희생자 수습을 했기 때문에 거의 깜깜한 상태에서 더듬어서 일(희생자 수습)을 했습니다. (물속에서) 라이트를 비추면 (빛이) 펴져서 비치는 게 아니고 부유물들이 많아 큰 의미가 없어요. 기둥처럼 발사가 돼요. 따라서 격실이 몇 호인지 자세하게 볼 때만 필요하고 수색할 때는 큰 의미가 없어요.
다 촉각에 의존해 사람 손으로 더듬어서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도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저는 참고로 93년도에 서해페리호 참몰 당시에도 투입해서 일을 했어요. 그땐 군인이었고 그때도 더듬어서) 했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장비가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희생자 수습하는 작업만큼은 다른 어떤 장비가 필요 없는 거예요.
(세월호의) 통로도 아주 좁고 복도 높이가 1m 정도인데, 배가 옆으로 넘어졌기 때문에 그 폭 1m가 높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장비를 많이 멜 수가 없어요. 해군 SSU 대원들이 약 100명 정도를 찾았고 저희 민간 잠수사들이 약 200명을 찾았어요. 해군은 헬멧을 쓰고 ‘언빌리컬(umbilical)’이라고 하는 두꺼운 생명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런 장비를 착용하면 작은 격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희는 장비를 개량했습니다. 헬멧 대신 안면 마스크를 사용했고, 생명줄도 가느다란 농약 호스 같은 것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비를 하고 나면 마음이 부담됩니다. 배가 철판이기 때문에 날카로운 부분이 많은데, 그 호스는 커터칼로도 잘릴 정도거든요. 그게 잘리는 순간 저희도 위험해집니다. 물속에서 위험하다는 건 다치는 게 아니라 사망입니다. 숨을 못 쉬면 사망이죠.
도면을 외워서 깜깜하고 꼬불꼬불한 곳들을 가야 되기 때문에 저희도 되게 위험을 무릅쓰고 한 거예요. (배가) 옆으로 넘어지면서 복도가 좁아지니까 한 명 한 명 데리고 나오는 것도 힘들고, 비상 탱크를 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비상 탱크를 복도에 해놨어요.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거기까지 숨을 참고 이동한 뒤 숨을 쉬는 거로. 그 정도의 잠수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경험자가 많지도 않고, 위험하기 때문에 많은 잠수사들이 오더라도 다 필요가 없어요. 제가 갔을 때 8명이 있더라고요. 그 많은 사람을 찾기엔 너무 역부족이죠. 그 이후로 경험자들이 한 명 한 명 더 와서 총 25명 정도가 민간잠수사가 됐는데, 이 25명은 두 달 동안 실제로 잠수하며 희생자 수습 작업을 한 분들을 말하는 겁니다. 사실 한 100명 정도가 있었는데 잠수를 하지 않고 그냥 가신 분도 있고, 하루 물에 들어갔다가 조류에 휩싸여 그냥 가신 분들도 있어요. 그 25명이 두 달 동안 4월 18일부터 7월 10일까지 현장에서 (미수습자) 11명을 남겨놓고 293명을 찾았습니다.
저희는 7월 10일까지 있고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오신 분들은 업체와 계약을 맺고 얼마를 받겠다 하고 온 잠수사들이에요. 그분들은 다치면 산재를 받으면 되는데, 저희는 개인적으로 왔기 때문에 산재도 못 받고 국가가 저희를 치료해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의외로 물속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옷 갈아입을 때 공포가 가장 심했어요. 이번에 무너지지 않고 무사히 올라올 수 있을까. 공기가 새지 않을까. 호스가 꼬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두려워하다가도 물에 들어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말한다.
"한 명 구했다. 한 명 엄마한테 보냈다"
잠수사들은 세월호 내부에서의 기억에 대해 말한다. 유리를 깨고 학생들을 데리고 나오던 순간, 물속에서 마주했던 얼굴. "겁에 질린 채 임종을 맞이한 얼굴이었어요."
한 잠수사는 부력조끼를 입고 천장 쪽에 떠 있는 학생들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데리고 나오려 했다고 했다.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에 한 잠수사는 이렇게 답했다.
"오히려 반가웠어요."
어떤 잠수사는 안도했다. "한 명 구했다. 한 명 엄마한테 보냈다."
또 다른 잠수사는 유리를 깨고 아이들이 잡히는 순간 물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고 했다.
잠수사는 아이들을 안고 올라오며 했던 말을 기억했다. "춥지? 따뜻한 데로 빨리 가자."
영웅이라서 간 게 아니라 사람이니까 갔다는 잠수사들. 여전히 잠수사들은 그날의 아픔을 품은 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술과 수면제에 의존하며 잠에 들고 병원 치료를 받으며 그때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있다.
구조 책임을 잠수사들에게 떠넘기려던 국가로부터 받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하고 있다. 국가는 잠수사들을 쫓아냈고 죄를 물었다. 물을 가르던 잠수사들은 거리에 나와 목소리를 내어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잠수사들은 제대로 된 치료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그 아픔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하고 있는 현재를 보여준다.
상영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고요해진 분위기에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엔딩크레딧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상영 이후 이어진 간담회.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단원고 2학년 5반 이창현 어머니인 가족협의회 대회협력부서장 최순화 씨는 영화를 보는 동안 계속 그날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부모로서는 아이와 정상적인 이별을 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데려와 주신 분들이 너무 고맙고, 정말 백 번 천 번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죄송한 마음이 크다며 "모두 한결같이 아프시고 예전 잘 나가던 산업잠수사로서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속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영화를 연출한 복진오 감독 역시 긴 시간 동안 잠수사들을 기록해 왔다. 감독은 트라우마 이야기를 꺼내며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슬프면 울면 되고 욕이 나오면 욕하고 괴로우면 괴로워하고… 일상의 한 부분으로 안고 살아가는 게 낫더라고요."
복 감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풀어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출렁다리 만들고 관광용 데크 만드는 데 몇백억은 쉽게 결정하면서 왜 이런 부분은 인색할까. 왜 이건 선심이라고 생각할까."
그러면서 "요구하는 사람들이 더 단호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간담회 후반부에는 국가와 사회에 바라는 점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김 잠수사는 치료 지원 이전에 답답함이 먼저 든다고 말했다. 그는 "12년 동안 유가족과 여러 단체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왜 참사는 반복되는지 생각하게 된다"며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 답답함을 표했다.
또한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김 잠수사는 "배가 계속 기울면 결국 침몰한다는 걸 현장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고 했다.
간담회의 마지막 질문은 고 김관홍 잠수사가 남긴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복 감독은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남고 버텨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각자가 자신을 먼저 지키며 살아남는 것 또한 뒷일을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김 잠수사는 김관홍 잠수사가 떠나기 전 남긴 부탁은 결국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달라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아직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며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오늘 우리는 다큐멘터리 한 편이 아니라 지금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한 시대의 기록을 들었습니다." 사회자는 이 영화를 보고 간담회를 함께한 것 또한 기록이라며, 고 김관홍 잠수사가 부탁하고 간 뒷일은 "기억하고, 약속하고, 끝까지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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