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안산 시민의 질문 "납골당이라니요? 안전지대입니다"

언론 속 4·16재단
작성자
4・16재단
작성일
2024-01-08 11:42
조회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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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기사 내용

 

경기 안산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로 향하던 지난 11월 4일, 가방을 뒤적였다. 휴지가 없다. 눈물이 나면 어쩌지. 콧물도 훌쩍일 텐데. 가방 안쪽으로 손을 넣어 더듬다가, 지금 이런 사소한 걱정이나 할 때인가 싶었다. 추모 예배에 가는 길. 종교가 없는지라 참사 관련 추모 예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없다. 수백 개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라니, 막연한 무게감이 짓눌렀다.

잎사귀를 지붕 삼아 열리는 예배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후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했다.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안온하다'고 믿었던 일상이 흔들리는 가운데 자신을 부여잡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분향소에서 기도를 올렸다. 팽목항에서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에서 거리 곳곳에서. 지난 2015년부터는 안산 합동분향소 앞 주차장 부지에 가건물(컨테이너)을 세워 기독교인들의 예배실로 삼았다.

2018년 합동분향소가 철거될 때 예배실도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하늘 아래에서 예배가 열린다. 예배는 그달과 같은 숫자를 가진 반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1반, 2반... 그렇게 겨울이 가고 3반, 4반, 5반... 봄이 온다. 앙상한 가지와 푸르른 잎사귀, 떨어지는 낙엽이 지붕을 대신한다. 내가 찾아간 날은 11월. 열 개의 교실을 지나 단원고 선생님들을 기억하는 달이다.

김초원 선생님, 남윤철 선생님, 박육근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선생님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른다. 그 시간이 어떤 기도문 낭독보다 엄숙하다.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리고 기억되는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1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공간

조선재, 그도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저를 소개하자면 예배팀이고, 세 아이의 아빠이자 교회에선 집사입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자 직장인. 그리고 안산 지역 시민이다.

"세월호참사가 있기 전까진 저는 행동하는 시민은 아니었어요. 수원이나 안양만 됐어도 이렇게까진 못했을 거예요. 그냥 아파하고 그러다가 잊고 지냈을 것 같아요. 그런데 4.16세월호참사는 안산이라는 지역의 공통 분모가 있었던 거죠."

집을 오가는 길에 분향소가 있었고, 분향소에서 예배가 열렸다. 그리스도인이자 교회 집사였던 그는 예배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 걸음이 9년째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예배가 좀 독특한 것이, 보통 교회는 목사님이 설교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말씀 읽고 같이 나눔을 하거든요. (세월호) 가족들의 말씀 나눔은 어떤 설교보다 강해요. 그분들이 끊임없이 뭔가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힘이 상당해요. 예배가 구심이 되어 우리가 모인다는 의미가 크게 다가오죠."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쌓여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사이가 됐다.

"세월호참사 초에 가족들이 눈치를 많이 봤어요. 사람이 웃는 일도 있는데, 그러면 손가락질 당하고 공격받아서 마음 편하게 웃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예배팀에 오면 그분들은 너무 편해하는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그게 기쁨이에요. 이분들이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예배는 잔잔한 웃음으로 채워졌다. 간식 준비한 사람을 소개하며 웃고, 자유 발언을 할 사람을 찾으며 웃고, 누군가의 농담으로 웃고. 그런데 조선재는 같이 웃을 시간도 없어 보였다. 예배 내내 사진을 찍고 영상 촬영을 했다. 예배가 끝난 후에는 의자를 정리하고 짐 정리를 하는 무리에 섞였다. 예배팀에서 집사로 불리는 사람, 그런 그가 한 발 깊숙이 세월호 문제에 들어온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 분향소 앞에서 거짓말할 수 있나요?"

"세월호 10년 중에서도 전반부에는 분향소 예배만 드렸어요. 단원고 교실 존치 때문에 교육청 앞에서 피케팅은 해봤도, 청와대 가서 1인 시위하고 광화문까지 가고 그러진 않았거든요."

그가 구분 짓기론 후반부, 2018년부터 점차 반경을 넓혔다.

"4주기 때 영결식하고 정부합동분향소가 철거됐었어요. 문재인 정부가 진상규명 하겠다고 공약해서 기다렸던 거예요. 기다렸다기보다 공약을 지키는지 모니터링하고 지켜봤죠. 이후 2년이 지났는데 딱히 진실 규명이 됐다고 할 만한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공약을 지켜라', '진상규명 약속 이행하라' 하면서 청와대 앞에서 피켓도 들고. 합창단 활동도 하면서 광화문으로 밖으로 그렇게 나가게 된 거죠."

조선재가 물었다.

"어떻게 아이들 분향소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 있나요? 성경은 '약속의 연속'이에요. 구약은 오래된 약속, 신약은 새로운 약속.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말로는 약속한다고 하지만, 약속에 민감하지 않죠. 우리 사회의 딜레마 중 하나인 거예요."

약속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피켓을 들었다. 예배팀의 조 집사를 만나러 간 것이니 애도와 기도에 관해 묻고 싶었는데 그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지금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크게 두 가지인데.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찾기 위한 싸움, 그리고 추모공원 공약을 관철하기 위한 싸움. 그 중요한 두 가지 싸움을 안고 10주기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한번 달려보려 합니다."

첫 삽조차 뜨질 못했다

안산으로 가는 길, 보수단체가 내건 '세월호 추모시설 건립 반대' 현수막이 보였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 10주기에 맞춰 그 이전까지 세월호 추모 공원(4.16생명안전공원) 조성을 약속했다. 현재 공원은 부지만 덩그러니 존재한다. 이를 개탄하며 사람들은 "첫 삽조차 뜨질 못했다"고 말했다. 착공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예산이 확보된 상황에서도 정부와 시 지자체는 착공을 미적거리고, 그러는 사이 물가 상승으로 자재비와 공사비가 올라 정해둔 예산이 초과됐다. 기재부는 이를 근거로 사업비 적정성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6개월간의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착공 시기가 또 연장됐다.

이런 시기에 예배팀은 생명안전공원이 자리할 그곳을 멈춤 없이 지켰다.

예배팀의 이름은 4.16생명안전공원 예배팀이다. 처음 접했을 때는 어색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4.16교회, 세월호 예배팀, 이런 명칭이 더 잘 어울릴 텐데. 그러나 4.16생명안전공원이 처한 상황을 알기에 확인하듯 "4.16생명안전공원이 건립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팀 이름을 지은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응수했다.

"처음 예배를 드릴 때는 이름도 없었죠. 분향소 사라진 이후로는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당연하게 그 이름으로 굳어져 버린 거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이유도 진실 규명을 놓지 않기 위한 게 가장 컸고. 동시에 추모 공원 사업의 의미를 계속 살려 나가자는 취지가 있었어요."

예배팀 이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곳에서 세월호 문화제가 열릴 때마다 먼 길을 달려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추모공원은 부지조차 지금보다 더 외진 곳에 자리했을지 모른다. 4.16생명안전공원은 안산 시민들이 애용한다는 화랑유원지 안에 조성될 계획이다.

추모공원 설립이 필요한 이유

화랑유원지. 캠핑장과 미술관, 산책로가 있는 안산 시민들의 휴식처. 보수적 성향을 띤 단체는 이곳에 추모공원이 세워지는 것을 반대한다. 그들은 "화랑유원지는 안산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공원인데, 그곳에 영구히 국민들에게 슬픔과 추모를 강요하는 '납골당'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 추모공간을 조성하고자 하는 이들은 4.16생명안전공원이 비석이 줄지어진 추모 시설이 아니라고 한다. 참사의 아픔은 눈물로 곱씹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날의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를 치유하고, 참사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을 더듬는 공간으로 지역사회에 녹아들 수 있도록 4.16생명안전공원을 디자인하려 애쓴 시간이 있다.

사람들이 한가로이 '기억의 숲'을 거닐며 산책하고 가족 단위로 소풍을 나오는 그런 공간, 10년 전 단원고 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유원지였던 이곳에서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아픔을 기억하는 것을 불편한 일이라 생각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말이 익숙하다. 그런데 산 사람은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아야 하나. 추모와 애도는 이 질문을 하는 시간이다. 기도는 그 속에서 이뤄진다.

"10년 가까이 함께하시는 분들은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세월호참사를 내 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그 가족들에게 부채 의식을 느끼고요. 내 아이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빚을 갚아야 하는데 어떻게 갚겠어요? 가족들이 원하는 것이 목소리를 같이 내고 행동하는 거 아니겠어요?"

안산에 산다는 이유로 처음 세월호참사 분향소를 찾은 조선재가 추모공원 설립에 애를 태우는 이유다. 감정의 진폭은 달라졌어도 그가 움직이는 이유는 같다. 내 곁에서 일어난 일이다. 10년 전 봄, 이곳에 합동분향소가 세워질지 아무도 몰랐다. 참사는 불운한 일이지만 불운한 누군가에게만 닥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들, 세월호 10주기가 다가오는 이 시점까지, 추모공원이 유원지 한가운데 허허벌판으로 존재할 줄 알았을까.

10주기의 중요성

자신이 피켓을 든 이유를 말하며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잖아요?" 라고 격양된 어조로 묻던 그였다. 조선재는 예배 때 만나는 이들을 세월호 유가족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월호 가족이라고 했다. 그것은 매달, 매주 가족들을 만나온 그와 그렇지 못한 나의 차이일 것이다.

"세월호 100일 세월호 1000일, 2000일, 3000일. 그때마다 문화재도 징글징글하게 많이 했어요. 많은 날을 보냈는데, 손에 쥔 게 없는 것 같은 저는 공대 출신이기 때문에,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나와야 하나 봐요. 생명안전공원이라는 아웃풋이 나오려고 하는 찰나인데, 9부 능선을 못 넘어가고 있는 기분이에요."

예배팀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함께한 이 중 50명을 저자로 하여 그리스도와 세월호라는 주제로 책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엮었다. 그 책을 이고 지고 전국으로 북토크를 다닌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찾고 싶어 각종 위원회 보고서를 보며 자체 연구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예배는 하나도 안 힘들어요." 매달 예배를 준비하는 노고를 칭하자 그가 한 말이다. 많은 것을 했으나 첫 삽을 뜨지 못한 공원처럼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10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번 세월호 문제가 조명받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10주기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한번 달려보겠다고 했다. 지쳤으나, 의지를 놓을 순 없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붙잡는다.

내 이웃의 안전지대

4.16생명안전공원. 명칭에 '안전'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갔다. 이때의 안전은 단지 위험이 닥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포기할 수 없는 약속>에서 기도문 한 구절을 가져온다.
"이곳에 세워질 4.16생명안전공원은
… 시대의 약자들을 품으며 기꺼이 그들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샬롬의 안전지대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배팀 이야기를 하던 그가 "세월호 가족들이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기쁨이에요"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말했다.

"안전한 공간이군요."

그는 크게 끄덕였다. 서로가 이웃이 되어줄 때 우리는 안전하다. '조만간' 세워질 4.16생명안전공원이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에는 서로를 이웃 삼아 안전지대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있었다.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공원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영구히 슬픔에 빠지고자 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의 이웃이 되어주자는 약속을 기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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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 희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