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김경희] 끝내 와 닿지 못한 이곳에서, 마주하는 마음으로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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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2023년 2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김경희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끝내 와 닿지 못한 이곳에서, 마주하는 마음으로 >

1
“엄마, 내가 생각했던 고등학교 생활이 아니어서 너무 힘들어! 자퇴하고 싶은데 수학여행은 가고 싶으니 그때까지만 버텨볼게요.”
“아, 그래….”
”엄마, 무슨 생각해? 내 얘기 듣고 있어?“
“음, 듣고 있어. 다녀오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엄마는 기다릴게.”

둘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쯤 지나자 적응이 힘든지,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최대한, 무던하게, 들어주려고 노력했고 퇴근하면 바로 픽업을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입에서 ‘수학여행’이라는 단어를 듣자 순간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먹먹해졌다.

이곳, 제주에서는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뭍으로 수학여행을 간다. 코로나19가 찾아와 일상이 뒤엉켜 버린 1년 차에 둘째는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없었다. 3년 차가 되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다니는 고등학교에서도 10월에 수학여행을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둘째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가는 뭍으로의 첫 수학여행이었던 셈이었다. 원하던 고등학교 생활이 아니라 낙담했고 자퇴까지 생각하고 있지만 중학교 때 가보지 못한 수학여행은 친구들과 꼭 가보고 싶다고, 그 설레는 마음으로 그동안은 버티겠다고 했다.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엄마로서는 반가울 노릇이었다. 수학여행 이후 선택하겠다는 통보(?)에 오히려 시간을 번 것 같은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수학여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잊히지 않는 슬픔이 떠올라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선생님들. 누군가의 딸과 아들이었던, 부모였던 그들이 수학여행을 오던 중 맞이한 처참한 죽음과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고통스런 절규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이 향했던 이곳,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나는 TV로 봤던 그 날의 참상이 떠오르며 더 모골이 송연해졌다.

2
꽃피는 4월의 제주는 몹시도 찬란하지만 이미 슬픈 역사와 기억을 머금고 있다. 얼핏 보면 시대와 공간, 대상이 달라서 다른 듯하지만, 국가가 죽음으로 내몰거나 방치한 사건이라는 맥락에서는 닮아있다고 볼 수 있겠다. 곧 75주기를 맞이하는 제주4•3사건이 그것이다.

와락 초봄, 제주의 지상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이마에 눈꽃을 인 한라산에 경탄하지. 이 땅을 둘러본 사람들은 말하지. 이렇듯 기막히게 매혹적인 풍광 속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정말 그럴까. 제주도의 사월은 참으로 화사한 유채꽃으로 온 섬을 물들이지만 그것이 비린 아픔이라는 것을 아는지. 아름다움의 이면에 도사린 끔찍한 그 시절 이야기를, 이 섬에 참혹하게 피어난 붉은 꽃, 노란 꽃들은 어떻게 스스로 치유하는지를. (14쪽)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 기막히니 눈물마저 막혀버렸지. 단지 공포의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고, 갑자기 증발해버린 가족들의 자리를 보면서 가슴만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지. 왜? 어떻게 백성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국가공권력이, 이렇게 무참히도 사람을 죽이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110쪽)

– 허영선 님의 「4•3을 묻는 너에게(서해문집)」

팔순이 넘은 친정어머니와 일흔아홉의 시아버지는 제주4•3사건의 희생자 유족이다. 6살, 4살이던 아이들이 부모와 형제를 잃고 고아나 다름없이 억척스레 살아내야 했던 75년은 그야말로 ‘한의 세월’이었다. 그 당시 허망하게 죽어간 섬사람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오빠, 언니, 동생이었다. 짐승처럼 도살되어도 상관없는, 이름 없는 무리가 아니었다. 척박한 제주 땅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숭고한 삶을 살아가던 섬사람들이었다. 제주4•3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제주가 찬란함과 슬픔의 두 얼굴을 가진 모순된 땅이라고 표현한다. 딛고 서 있는 제주의 어느 땅 하나도, 만지는 저 돌멩이 하나까지도 슬픈 4.3의 역사와는 무관하지 않아서다.

3
이제 곧, 4월이 오면 세월호 참사는 9주기를, 이곳 제주4•3사건은 75주기를 맞는다. 다른 듯하지만 닮아있는 아픔의 역사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 들여다보고 마주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사실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글재주가 아직은 미천한 수준이라서 부끄러웠던 것도 있었고, 직접 관련자도 아닌데 이 글을 써도 될까의 생각, 당사자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니어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대신 쓰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일이란 걸 어느 작가님의 북토크에서 들었던 게 기억이 났다. 두 아이의 엄마로, 청소년들을 만나는 사람으로, 어쩌면 마땅히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용기를 내어 펜을 들었다.

아픈 역사의 희생자인 섬사람들이 평생동안 어떻게 한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보다 이를 말하지 못하는 아픔이, 강요된 침묵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어떻게 일상을 잠식해 가는 지도 목도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을 지속해서 알리고 풀어놔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부족하나마 이 글이 세월호 참사를, 제주4•3사건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데 조금이라도 가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절절한 그 이름들을 불러주자. 희생자와 유족들의 가슴 저미었던 사연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고, 오래오래 듣고, 기억하도록 하자.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오랫동안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수학여행’ ‘핼러윈 축제’라는 단어에 더는 흠칫 놀라지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지도 않을 수 있으리라.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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