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옥 님] – 세상 ê·¸ 누구도 혼자 ì‚´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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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누구도 혼자 살 수 없어요.

<‘재난 현장 속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 이경옥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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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허를 응시하라」. 리베카 솔닛은 북아메리카에서 발생한 다섯 건의 대형 재난을 깊이 연구한 뒤 이런 책을 썼다. 폐허가 된 삶과 사회를 오랫동안 바라본 솔닛은 거기서 무얼 발견했을까.

재난이 할퀸 곳은 종종 ‘지옥’에 비유된다. 지옥은 우리에게 고통과 절망이 소용돌이치는 곳으로 상상된다. 그런데 솔닛은 그 지옥 같은 재난 상황에서 회복력, 동정심, 용기, 연대의식 같은 인간의 깊은 속성이 두드러지게 발현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인간은 고통과 절망을 마주할 때, 회복과 희망을 피워낸다. 재난 현장에는 언제나 부족한 시스템의 틈새를 메우며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러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 곳곳의 재난 현장을 조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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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ton text=”그날의 통곡 소리” color=”secondary” style=”out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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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안산에서 오래 살아온 이경옥 씨는 그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부동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해달라는 제안을 받은 까닭이었다. 평생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봉사활동을 해왔지만 새로운 활동에는 늘 신중했다.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책임의 무게를 가늠하며 질문을 거듭하다 그 소식을 들었다.

“고등학생들 몇 백 명이 탄 배가 뒤집혔대. 그런데 그 학교가 안산에 있다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시간이 멈춘 듯 현실감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려 찾아본 뉴스도 우왕좌왕하긴 마찬가지. 정확한 소식은 알 수 없으나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것도 내가 얼굴을 아는 이웃들에게. 떨리는 가슴을 안고 이경옥 씨는 안산시자원봉사센터에 전화부터 걸었다. 거기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터였다.

“현장에서 자원봉사할 사람들이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로 출발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 버스를 타고 진도체육관으로 내려갔어요.”

2014년 4월 17일. 이경옥 씨는 세월호 참사 발생 이틀째에 참사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광경과 마주했다. 수백의 사람이 피를 토하듯 울부짖고 있었다.

“말도 못 하지. 그때 그 통곡 소리는 말도 못 해요.”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이 들끓는 용광로 같았던 그곳에서 이경옥 씨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아득해진 정신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가자 통곡하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동네 곳곳에서 늘상 마주친 얼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어떤 일에 웃고 어떤 일에 한숨 짓는지 내가 익히 아는 그 얼굴들이 보일 때마다 끌어안고 울었다. 이경옥 씨는 진도 팽목항에 메아리친 통곡의 한 조각이 되었다. 그 후로 무려 44일간, 진도와 안산 합동분향소를 오가며 자원봉사자로 수습 현장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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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ton text=”함께 울며 밥을 권하는 마음” color=”secondary” style=”out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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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3세의 경옥 씨는 요리교실을 이끌 만큼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 오랜 자원봉사활동 경력에서 이 재주는 톡톡한 역할을 했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채우고 서로 화합하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 그녀가 가는 곳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수백의 부모들 앞에서 밥차의 베테랑은 난생처음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부모들이.”

정성을 다한 음식들이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분들이 무얼 먹을 수 있었겠어요. 제가 아들이 둘인데, 둘째를 늦게 낳았거든요. 그 아이가 희생당한 학생들과 같은 또래예요. 부모 마음 다 똑같잖아요. 통곡하는 부모들을 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이건 진짜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안 먹겠다는 부모들에게 말했어요. 빨리 먹고 정신 차려서 애들 찾아야지. 그러면서 달래고 안고 같이 울었어요.”

자식이 수장된 바다 앞에 엎드린 부모들에게 밥을 권하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삶을 놓고 싶은, 어쩌면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살려야 했다. 살리는 것이,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들의 책무였으므로.

“세월호 가족들은 이런 걸 잘 먹었다, 그런 걸 메모해가지고 봉사자들이 바뀔 때 서로 전달해 줬어요. 약밥 같은 걸 잘 드셨다 그러면 그런 걸 좀 더 해놓고 그러는 거죠.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으면 유가족들이 마음 편하게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외부의 시선이 차단된 곳에 식사를 따로 차려드리기도 했어요.”

수습 현장은 열악해서 경옥 씨는 천막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깊이 잠들기 어려웠다. 주방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없어서 냉장고가 지저분하고 썩어나는 게 많았다. 팽목항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냉장고부터 청소했다. 그런 뒤 수많은 사람이 먹을 음식을 차려냈다. 힘들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이건 당연히 내가 해야 되는 일이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건 차라리 기쁨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리다 돌아서야 했던 미수습자 가족들을 생각하면 경옥 씨는 가슴이 미어진다.

“제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팽목항에서 배 타고 청산도도 몇 번 가고 그랬어요. 세월호 참사 뒤로는 아… 그냥 어디도 가고 싶지 않다…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더라고요. 요즘에는 그냥 봉사활동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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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ton text=”더불어 사는 삶” color=”secondary” style=”out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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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옥 씨는 충청남도 논산이 고향이다. 6녀 1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세상에 헌신하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착한 딸은 “네가 결혼하는 걸 보는 게 내 소원”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다. 스물다섯에 중매로 남편을 만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스물일곱에 첫 아이를 낳고 얼마 뒤 안산으로 왔다.

“선부 2동에서 37년을 살았어요.”

경옥 씨가 터를 잡을 때만 해도 한갓진 마을이었던 선부동의 풍경도 흘러간 세월만큼 많이 변했다. 골목은 어느새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이 더 많아졌다.

“고려인들이 많이 살아요. 외국인들도 많고요.“

그런 이유로 이곳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여기 사람들을 거칠다 말하는 한국 사람들이 두루 있어요.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가까이서 이야길 나눠보면 그 사람들이 더 부드럽고 인사성도 밝아요. 제가 뭐라도 나눠주면 자기들이 만든 음식 같은 걸 꼭 가져와요. 이 동네에 뭐 도둑들이 많다고도 그러는데, 제가 37년을 살았지만 도둑맞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되려 정이 넘쳐나는 곳이에요.”

다채로운 삶의 경험을 통해 경옥 씨가 체득한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못 살아요.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서는 못 살아요. 더불어 살아야 해요.” 그렇기에 경옥 씨는 사람들 곁으로 한발 다가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희 집 골목 끝에 고려인 센터가 있어요. 거기서 뭘 한다고 하면 항상 가요. 가서 그 사람들 음식도 먹어보고 어울리는 거예요.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면 그 사람들도 가까이 와요. 그렇게 같이 어울려야 해요.”

경옥 씨가 안산을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이곳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기에 세월호참사의 아픔에 대해서도 잊지 않으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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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ton text=”사람은…” color=”secondary” style=”out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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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옥 씨는 자원봉사자로 수많은 활동을 해왔다. 홀로 사는 노인들의 식사를 챙기고, 강력 범죄로 큰 부상을 당해 입원한 피해자의 간병을 지원하고, 자율방범대로 마을의 안전을 살피고, 폭설과 폭우로 재해를 입은 지역의 복구를 돕는 일에도 함께했다. 해온 일을 꼽아보자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자원봉사활동을 오래 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을 한다.

“남을 도와주면은 내가 더 행복해요.” 경옥 씨는 그 말을 바꿔 이렇게 말한다.

“도와주는 마음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요.”

경옥 씨에게 다시 물었다. 왜 도와주는 마음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냐고.

“사람들한테 나눠주면 다시 사람들이 뭘 가져와요. 그래서 또 나눠주게 돼요. 봉사를 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따듯한 마음을 알게 돼요.”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이기심에 대해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 이기심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너른 마음에 대해서는 종종 잊는다.

지난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핼러윈데이 압사 참사 역시 이 사실을 여실히 일깨웠다. 참사가 발생한 직후 일각에서는 나만 살겠다거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질타하기 바빴다. 손쉬운 비난이 춤을 출 때, 이태원의 긴박한 재난 현장에서 타인을 돕고 타인을 살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워진다.

죽이는 마음, 살리는 마음 모두 인간의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 마음에 달려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보게 될 것이 단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는 걱정하는 마음은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살아요. 아등바등하지 않고 나누다 보면 그만큼 제게 돌아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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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 4·16재단 / 후원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 담당 – 모금홍보팀 유진솔 / 글 – 박희정 (인권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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