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재단 대학생 기자단 3기] 7월 생명존중아카데미 <우리가 몰랐던 그 날 바닷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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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아카데미’는 4·16재단이 청소년 · 청년의 꿈을 지원하고자 시행하는 강좌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매달 꿈쟁이(활동 참여자)를 대상으로 진행한다.

이번 7ì›” ‘생명존중아카데미’에서 꿈쟁이들은 영화 「로그북」 관람 및 GV(복진우 감독, 김상우 잠수사와의 대화)를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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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북> 시놉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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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큐멘터리 〈로그북〉은 잠수사들의 잠수일지, ‘로그북’을 중심으로 세월호참사 현장에서 70여 일간 시신 수습에 참여한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재난 이후, 그들이 자신의 삶을 복원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출처 :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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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태껏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에 이러한 점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참사 이후 수습 작업을 진행했을 무렵, 잠수사들에 대한 여러 의혹과 오해들을 언론에서 다뤘고, 이에 관련 기사를 접했던 기억이 난다. ‘언딘’이라는 업체만이 수습 작업에 참여했다는 등의 의혹, 그리고 언딘 소속 잠수사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포털사이트에 게시됐던 게 생각난다.

하지만 이는 오해였고, 틀린 사실이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언딘’이라는 업체는 장비만 빌려준 곳이었고, 참사 해역에 모인 잠수사들은 민간 소속으로 개개인으로 모여 수습에 참여하게 된 자원봉사자의 형태였다.

당시 600여 명가량의 잠수사들이 현장에 모였지만, 그중 실제 참사 해역에 들어갈 수 있는 잠수사는 몇 되지 않았다. 참사가 발생하고 70여 일간 참사 해역에 머물러 수습 작업에 참여한 잠수사는 겨우 25명뿐이었다.

그 정도로 참사 해역에 들어갈 수 있는 잠수사들의 명수가 매우 적었던 것이 밝혀졌다. 수많은 잠수사들이 참사 해역에 도전했으나 물길이 거세어 위험하고, 생명과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금세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5노트 이상 조건에서도 구조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던, 미국에서 온 잠수 경험이 있는 이 역시 해역에 들어가고서 검증 잠수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물 위로 올라오게 됐다. 이유는 안전하지 못했기에. 그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는 그런 악조건의 바다였던 거였다. 그러나 민간 잠수사 25명은 달랐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노력했던 잠수사들의 모습을 영화 「로그북」 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11명의 미수습자가 남겨진 시점에서 정부는 계약 채용을 통해 새로운 잠수사들이 현장에 들어가게 하고, 25명의 잠수사들을 갑작스레 철수시킨다. 이 말인즉슨 70여 일간 수습에 참여한 잠수사들은 정부와의 어떤 계약이나 조건 없이, 그냥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의 태도는 영화를 보고 있는 나조차 상실에 빠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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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김상우 잠수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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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월호참사 이후 수습과정에서 당시 해역의 상황은 어떠했나?

수영을 잘한다고 해서 쉽사리 들어갈 수 있는 해역이 아니었다. 조류가 너무 셌다. 마치 비유하자면 태극기가 휘날리듯 몸이 날리더라. 잠수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도 힘든 곳이었다. 잠수사 600여 명이 있었으나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함부로 잠수를 할 수 없었다. 사고 현장에 대한 경험이 있는 잠수사 위주로 작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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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참사 이전에는 무엇을 했나?

20년간 잠수 일을 했다. 92년부터 97년까지 군대에서 잠수를 했고, 이후 93년도에 서해 훼리호, 94년에는 성수대교 붕괴현장, 이후 북한 잠수함 인양 등의 작업에 투입됐었다. 군대를 나온 이후에도 잠수를 계속 전문적으로 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 지금껏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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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신적으로 힘든 작업이었을 텐데, 어떻게 트라우마를 이겨냈는지.

아픔이 아문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아픈 사람 또한 있다. 그러나 잠수사들 사실 씩씩한 사람들이다. 담대하니까 잠수일 하는 거다.

70여 일간 작업했다 보니 각인이 되어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다른 현장에 가서 잠수해야 하니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분이 그러더라. 그냥 기억이 나면 기억을 하고, 욕이 나오면 욕을 하고, 울고 싶으면 울라고. 억지로 잊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활의 한 면이라 생각하고 다녀야 한다고. 그러면서 나아진 부분이 분명 있었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트라우마가 일 이년, 시간을 좀 두고 생길 수도 있더라. 16년 초여름, 김관홍 잠수사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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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습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 사고로 목디스크가 생겼다고 들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셨는지.

(사고가 난 경위를 설명하며) 원래 상태라면 왼쪽 객실이 왼쪽에, 오른쪽 객실이 오른쪽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배가 옆으로 넘어졌으니, 위아래가 바뀌게 된 거다. 왼쪽 객실을 열려면 위쪽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문을 여니 짐이 위에서 쏟아지더라.

보통 이럴 때,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는 호스만 살리면 살아서 나갈 수 있다. 짐에 깔려서 탈출을 못하더라도 통신이 가능하고, 따라서 나중에 구출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당시 호스를 살렸던 기억이 있다.

위에서 짐이 쏟아지면서 바로 양쪽 팔을 못 쓰겠더라. 결국 디스크가 터지고 수술을 받았다. 참고로 잠수사들은 정부가 재난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아 어떠한 치료도 지원받지 못했다. 그래서 세월호 때 잠수 작업한 잠수사들은 일터 현장에서 잘 받아주지 않기도 했다. “다 치료 받고 현장에 와라”고 하더라. 사실 맞는 말이다. 정부에서 잠수사들을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기에 치료가 제때 되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다른 현장에서 작업하다 기존에 있던 부상이 커지면 그 현장에서 산업재해를 받게 되는 것이니 잠수사들을 받아주지 않았던 거다.

결국 수난 구조법에 따라 잠수사들은 장애를 진단받거나, 죽어야만 치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현실을 마주했다. 지금은 해상 구조법으로 바뀌었으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동일하다. 시간이 지나 차츰 정부에서 치료를 지원해주는 쪽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잠수사를 피해자로 인정되지 않아 병원에서 정부 쪽에 치료비를 청구할 경우, 지급조건이 매우 까다롭게 설정돼 있는 걸 확인했다. 이에 병원에서 통증이 있는 잠수사들을 치료하기 꺼리는 경우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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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떻게 끝까지 참사 해역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으셨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 SSU 해군 후배가 현장에 가 있어 안부 전화 겸 몇 명이나 있냐고 물으니 “8명”이라고 하는 거였다.

8명인 이유가 있었다. 팽목에 와있는 600여 명의 잠수사들은 레포츠 잠수사들이었다. 스쿠버 장비는 이 상황에 맞지 않는다. 공기통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공기통을 이고 들어가면 객실로 진입하기가 어렵다. 복도와 객실 폭이 좁기에 넓은 공기통을 진 채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기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 사고가 난다. 하지만 (수습 작업을 했던 잠수사들의 방식은) 호스를 통해 무한대로 공기를 공급받고, 호스를 잡고 올라가면 되었다. 또한 폰으로 통신을 연결한 채로 작업을 하면 되어 돌아다니기에 용이했다. 그런 상황에서 돕고 싶어 내려갔다. 처음엔 3박 4일 정도만 잠수하면 다음 잠수할 사람이 보충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해경 쪽에 잠수할 인력이 없는 거였다. 이후 민간 잠수사들이 일을 할 만한 사람에게 연락을 돌렸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잠수사가 100명도 채 되지 않더라. 그러한 사람 중 이미 다른 현장에서 돈을 잘 벌고 있는데, 다 내팽개치고 위험한 곳에 자원봉사를 하러 온다는 게 사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 않나. 참사 해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많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시간 지연도 많이 됐다. 잠수 테스트도 해보지 않은 채 현장에 투입됐고, 선체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다이빙벨도 문제였는데, 현장에 맞지 않은 장비였다. 추를 이용해 다이빙벨이 내려가는 식인데, 조류가 너무 세서 추가 흔들리고, 그래서 정확한 곳에 물체를 둘 수가 없는 상황이더라. 조류가 있으면 무조건 자리에서 이탈되기에 엘리베이터처럼 고정된 위치로 갈 수가 없다. 결국 그래서 사람이 보충되지 않고 25명만이 투입된 거다. 따라서 내가 끝까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너무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각종 욕까지 먹으면서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단 생각에 철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철이 아빠가 부탁하시더라. 우리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부모님들 보고서 끝까지 현장에서 일하겠다고 했다. 대신 일만 할 테니 언론에 잘못된 이야기가 제발 보도 안 되게끔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7월 10일, 해경에서 어떤 업체와 계약을 하고 왔더라. 그렇게 7월 10일부로 민간 잠수사들이 모두 쫓겨나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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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트라우마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달라.

다른 잠수사분들을 대신해서 온 자리라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하겠다. 수습 작업 과정 중, 한 잠수사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해경이 선배 잠수사 한 명을 기소했다. 그 잠수사가 재판 도중 쓰러지기도 했다.

영화에 나온 황병주 잠수사는 트라우마 때문에 매일매일 죽고 싶다고 했다. 유서를 작성해서 나에게 보내기도 했다. 정신과 치료를 몇 년간 꾸준히 받고 나자 죽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한다. 치료해주신 정혜신 박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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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잠수사를 향한 비난과 잘못된 보도에 대한 처벌이 있었나? 그리고 민간 잠수사 측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 궁금하다.

준영이 아빠가 그러시더라. 잠수사들 치료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우리가 도와줄 테니 데모할 데 있으면 데모하고,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도와주겠다고. 그런데 우리는 그냥 치료받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보도 같은 것도 기자들…. 그들도 의도적으로 그러진 않았겠지, 한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국민들도 우리 마음 알겠지, 우리가 목숨 걸고 했다는 거. 기록으로나마, 영화로 보면 알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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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로그북」은 잠수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잠수사들에 대한 오해를 풀어줬으면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점에서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오더라. 그냥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뿐이다.

참사는 우리에게도 아픔이자 고통이다. 잊고 싶지 않고, 잊을 수도 없는 것이다. 참사 해역에 간 것에 대해 후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안 갔으면 오히려 후회했을 거다. 그냥 좀 더 빨리 많이 찾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오해를 풀자면, 잠수사들은 ‘언딘’ 소속 잠수사들이 아니다. 언딘은 챔버가 있는 바지선을 지원해줬을 뿐이다. 당시 잠수사들은 어떠한 소속 없이 개개인이 가서 모이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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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복진오 감독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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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로그북」 영화를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는지.

나는 레저 다이빙을 하고, 수중 촬영을 하는 사람이다. 전화로 잠수사들에 대한 상황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수습 작업을 하는 잠수사들을 알게 되었다. 이분들이 하도 욕을 먹으니까, 왜 욕을 먹는지 답답한 마음에 하루 정도만 취재를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이렇게 욕을 먹는 상황이 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 나중을 위해, 그리고 추가로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쨌든 현장을 기록하자는 마음뿐이었다. 첫날 마치 전쟁에서 용사들이 싸우는 것처럼 묵묵히 일하는 모습에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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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로그북」의 의미와 제목 선정의 이유

나는 당시에 잠수사들이 기록을 남긴 줄 몰랐다. 수색이 끝나고 돌아와서 잠수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로그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잠수사들이 로그북 공개하는 걸 상당히 꺼리더라. 수색이 끝난 몇 개월 후, 잠수사들과 계속해서 만났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때 하도 답답하고,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고 느끼니 그 과정 속에서 로그북을 내게 넘겨주더라.

카메라로 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로그북이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잠수 일지에 쓴 잠수사들의 수색과정과 느꼈던 점, 진솔함과 솔직함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것을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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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가 끝나고, 장소를 이동한 후 꿈쟁이들은 그룹별 모임을 가졌다. 꿈쟁이들은 각자 영화를 보고 난 뒤 서로의 감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간 한 활동에 대해, 그리고 이후 활동 계획에 대해 멘토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한 꿈쟁이 팀은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있어 장애인 관광 실태에 대해 조사활동을 펼쳐왔다고 설명했다. 관광지에 장애인 접근성이 잘 보장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등 관련 작업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꿈지원사업 담당자(4·16재단 나눔사업2팀 박정화 과장)는 “생명존중아카데미는 세월호참사 이후 안전 사회를 꿈꿀 수 있도록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교육을 진행하는 취지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하며 “이번 7월에는 영화 「로그북」을 감상했지만, 지난달에는 나태주 시인과의 만남, 노동권에 대한 강의, 문화 예술 감상 등을 하는 등 스펙트럼을 차츰 넓혀가고자 다양한 활동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꿈쟁이들을 지원하는 사업은 꿈을 향해 가는 여정들 속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이를 경험하기 위한 기회를 주는 자리”라며, “세월호참사로 인해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에게도 당연 꿈이 있었을 거다. 안전한 사회에 있었더라면 그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을 현재 밟고 있었지 않았겠나. 안타까운 요소들이 있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꿈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재단에서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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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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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재단의 대학생 기자단을 하면 어떤 게 좋냐는 물음을 만약 누군가가 내게 건넨다면, 4·16재단이 진행하는 사업과 행사들을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답하겠다.

사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내가 나이 먹어가는 걸 몸소 느낄 때쯤이면, 왠지 지금의 20대인 우리 세대만 세월호를 기억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면서 괜시리 울컥할 때가 있었다. 우리만 기억하는 게 아니길 바라고, 그때 일어난 일들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사회가,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기억했으면 하는 암묵적인 바람이 있다.

그런데 이 활동을 하니, 알겠다. 계속 기억되고 있구나. 설령 그때 그 일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이렇게 영화로, 기록으로, 사람들의 말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날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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