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천선란] 뼈에 새겨지는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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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2024년 6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천선란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뼈에 새겨지는 >

도시 구석구석 들떠 있던 크리스마스 연휴가 한차례 지나고, 새해만을 남겨둔 연말이었어. 나는 가족과의 송년회를 위해 강동구에서 일을 끝내고 인천으로 넘어가기 위해 7호선을 탔어. 60분이라는, 길고도 아득한 시간을 견디며 책도 읽고 잠깐 졸기도 하고 핸드폰도 보고 있던 그때 보라매역에서 전철이 멈추더라. 처음에는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잠시 정차한다는 방송이 나왔고, 두 번째는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으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이었어. 운 좋게 문 열린 전철에 뛰어 들어오는 탑승객과 대수롭지 않게 전철이 출발하길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어. 학생이 유독 나를 자세히 바라보더라고.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나?’ 하는 낯부끄러운 생각도 했는데 머지않아 시선의 끝이 내 왼팔이 새겨진 타투에 머물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뭐야.

그 학생의 표정이 낯설지 않았어. 중고등학교 강연을 가면 아이들이 으레 그런 눈으로 나를 봐. 그리고 꾹 참았다가 질문 시간에 손을 들어. “타투에 대해 물어봐도 돼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으면 나는 그렇게 하라고 하지. 그럼 그때부터 “엄마를 어떻게 설득했어요?” “안 아파요?” “지우고 싶으면 어떡해요?” “뜻이 뭐예요?”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질문들은 학교에서 들을 수도, 배울 수도 없는 분야에 대한 학구열로 가득 차 있어. 선생님들은 그럴 때마다 민망해하며 책과 관련된 질문을 하라고 하지만 나는 언제 나 성심성의껏 대답해.

“타투는 말이에요, 허락받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해놓고 들키는 겁니다. 요즘은 타투도 지우기가 가능해요. 하지만 할 때보다 10배는 아프다고 해요. 오래 걸리고요. 그러니 타투를 할 때는 신중하게, 평생 내 몸에 어떤 흔적이 남아 있어도 되는지를 충분히 생각해봐야 해요. 그러니 섣부르게 하지 말고요. 온전하게 나인 것이 생겼을 때 하세요. 타투는, 내가 죽은 후에 내 삶을 말해주는 지침서가 될 테니까요.”

내가 쓴 「뼈의 기록」이란 단편에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봇 ‘로비스’가 나와. 소설에서 로비스는 고독사한 노인 박도해를 만나. 그의 등에 남은 문신.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탈각되는 피부를 두고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세포에서 세포로 인도되는 검은 잉크의 흔적을 말이야. 로비스는 그 문신을 보며 박도해의 삶을 헤아려봐. 아주 강한 자극은 뼈에도 새겨질거라 생각하면서.

내 앞에 앉은 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꼭 그걸 묻는 것 같았거든. 그때 전철 안내 방송에서는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안내가 나왔고, 아주 잠깐 전기가 나가며 불이 꺼졌어. 그 칸에 있던 사람 중 가장 먼저 일어난 건 그 학생이었고, 나는 두 번째였어. 방송에서는 여전히 반복해 말했어.

“열차 수리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떠들었지만 우리 두 사람은 더 기다리지 않았어. 기다리라는 말은 이제 나에게 당장 그곳을 벗어나라는 말처럼 들려. 그 말은 그러니까 뼈에 새겨진 타투 같은 거야. 수정하고 싶어도 수정되지 않는 것,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강렬하게 박혀 뼈에도 새겨진 것.

나는 그 학생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며 그 봄으로부터 올해 연말까지 이어져 온 바람을 생각했고, 내게도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이렇게 불현듯 제 존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한편으로 그 학생이 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전철을 내렸다는 사실에 안도했어. 그리고 내가 개찰구를 나와 잠시 방황하는 사이, 곧이어 다른 승객들이 몰려 올라오는 것을 봤어. 다행이었어. 움푹 파인 시절에 발이 걸려 넘어진 뒤에 우리에게도 상처가 남았구나. 그것이 문신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몸에 남았구나.

노력하면 지울 수도 있어. 그렇지만 새길 때보다 10배는 아플 거고 오래 걸릴 거야. 완전히 지워지지도 않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건 뼈에 새겨져 있거든. 그것이 이 시대를 설명할 거야.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에게 남아 있을 테니까.

천선란(소설가)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부문 대상을, 제7회·제9회 SF 어워드 장편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작품

『어떤 물질의 사랑』, 『천 개의 파랑』, 『나인』,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노랜드』, 『랑과 나의 사막』, 『이끼숲』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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