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김소영] 손이 닿는 곳

월간 십육일​

x

김소영


2024년 3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김소영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손이 닿는 곳>

어쩌면 나는 인생 최초의 도둑질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집 담장을 지날 때면 늘 그랬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골목에는 사람이 없는데… 집안에서는? 담장 너머로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가 안 났다. 어쨌거나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알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담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닿지 않았다. 힘껏 뛰어보았지만 겨우 손이 닿을 뿐, 큰맘을 먹은 게 무색하게 성과가 없었다. 개나리를 꺾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개나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제는 봄이 왔다고 말해주는 꽃이기 때문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이 되면 나는 마치 봄이 온 것처럼 들뜨곤 했다. 새 학년과 새봄은 당연히 같이 온다고 생각했다. 햇볕이 따뜻해졌으니 두껍고 못생긴 겨울옷은 안 입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 날씨는 그렇지 않았다. 학교 가는 길은 여전히 추웠고, 학교도 그랬다. 심지어 교실 안은 겨울방학 직전보다 춥게 느껴지기도 했다. 새 교실, 새 선생님, 새 친구들. 3월 초의 날들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왠지 3월에는 ‘봄’이 어울리니까, 나는 아마 봄을 상상했던 것 같다. 마음과 달리 날씨가 추워서 어쩌면 더 춥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때 등굣길에 개나리를 보면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개나리는 이름도 귀엽고 색깔도 예쁘다. 별처럼 생긴 꽃송이 하나하나도 사랑스러운데, 그런 꽃이 우르르 쏟아지듯 한꺼번에 피어난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 노란색이다. 병아리의 색, 유치원 옷의 색, 따뜻하고 환한 노란색. 미술 시간에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릴 때 쓰는 크레파스도 노란색이다. 제일 자주 쓰기 때문에 제일 빨리 닳던 색, 아껴 쓰던 색. 그에 비해 개나리는 다른 꽃들보다 일찍 피고, 오래 피어 있다. 질리도록 볼 수 있다. 질 때도 연둣빛 잎사귀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한 주만 지나도 흔하디흔한 봄꽃이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역시 맨 먼저 피는 꽃이었다. 그래서 그 담장의 개나리를 꺾으려던 것이다.

꽃을 꺾으면 안 된다. 그것도 남의 집 꽃을 꺾으면 더 안 된다. 고지식할 만큼 어른 말씀을 잘 듣는 내가 그걸 잊었을 리 없다. 꺾은 꽃을 둘 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꽃을 꺾으려고 무리한 건, 어디선가 개나리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지를 꺾어서 땅에 심기만 해도 개나리 나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슨 전설이나 마법 이야기가 아닌가 했다. 씨앗을 심지 않고도 식물을 키울 수 있다니, 그럴 리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런 게 ‘꺾꽂이’라는 번식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어쨌든 당시에는 한 번 시도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열렬했다. 마당은 없지만 집 근처 어딘가에 개나리를 꽂을 만한 구석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개나리가 무성해지면, 다시 꺾어서 다른 구석에 심으리라. 그리고 또 심으리라.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물론 그 풍선도 노란색이었다.

비록 그 계획은 실패했지만 지금도 3월이 되면 개나리가 피기를 기다린다. 개나리가 핀 것을 봐야 안심이 된다. 지금도 동네 어디에서 첫 번째 개나리가 피는지 알고 있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른이 된 내 손에도 닿지 않을 높은 자리다. 개와 산책할 때 일부러 그쪽으로 걸으며 자꾸 올려다본다. 꽃이 피기 시작한 날 말고, 흐드러지게 핀 날 사진을 찍는다. 개나리는 무더기로 있을 때 훨씬 예쁘다.

어떤 때는 마음으로 개나리를 꺾어 집에 가져온다. 아파트 화단에 심고 가꾸면 어떨까. 어린 시절 꿈처럼 노란색으로 뒤덮인 정원을 갖게 될까. 봄에는 눈부시고 여름에는 푸르른 울타리를 갖게 될까. 그렇게 작고 귀여운 꽃이 어떻게 봄을 가져오는 것일까. 개나리가 핀다고 해서 날이 따뜻한 건 아니다. 그러나 개나리가 피면 봄이 온다. 그건 틀림없다. 겨울 끝 새봄 전 여전히 춥고 쓸쓸한 날에, 봄을 기다리는 만큼 찬바람이 더 매정하게 느껴지는 날에 개나리가 핀다. 주위가 아름답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봄이, 아이들이 여행을 떠나는 봄이, 그다음에 온다.

세월호 이후 나는 개나리를 볼 때마다 그걸 세월호의 사람들에게 준다. 노란색 리본을 단 사람들에게도 준다. 그러니 누군가의 담장에는 개나리가 심어지기도 할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고, 더 많은 애도와 위로가 우리 사이를 오가고, 시간이 그렇게 제대로 흘러가면 그사이 개나리가 온 땅을 뒤덮겠지. 개나리가 흔하디흔한 꽃으로 무심히 피었다가 질 때, 그러니까 노란 꽃을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게 될 때 나의 봄도 시작될 것 같다. 이제 금방 개나리가 피겠지. 모두의 손이 닿는 곳에 피었으면 좋겠다.

김소영 (독서교육 전문가)

출판사에서 어린이책 편집자로 10년 넘게 일했고, 지금은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과 책을 읽고 있다. 누구든 어린이책을 읽는 재미와 의미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쓰고 있다.

작품

『어린이라는 세계』,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다른 소식들이 궁금하신가요?

 

One thought on “[월간 십육일 – 김소영] 손이 닿는 곳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https://416foundation.org/%ec%98%a8%eb%9d%bc%ec%9d%b8-%ea%b8%b0%ec%96%b5-%ea%b3%b5%ea%b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