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정세랑] 기억이 굳어가는 동안, 울타리처럼 서서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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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십일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2010년 <판타스틱>에 작품 발표를 시작으로, <창비장편소설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시는 정세랑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기억이 굳어가는 동안, 울타리처럼 서서>

 

매년 4월 16일이 되면 애도의 마음이 무거운 추처럼 가슴 위에 놓인다. 4월이 아니라도, 우연히 쳐다본 시계의 4시 16분마저 잠시 숨을 들이키게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세월호의 승객들이 마땅히 살았어야 했던 시간을 한 해 한 해 가늠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안다. 그런 얼굴들을 자주 마주쳐서, 지금쯤이면 세월호에 대한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제대로 된 기억을 공유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 상황은 그것과 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밝혀진 것이 없고, 밝히려는 사람들에 대한 방해만 교묘해질 뿐이다. 조작된 정보들과 벽 같은 제약들 때문에 얼마 전에도 유족 분들이 진상규명 농성을 해야 했다. 필요한 자료들이 6년 반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을 세다가 손가락이 모자라진다. 불응으로 기억을 훼손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금 살피게 된다. 우리가 꼭 가져야 할 공동체의 기억이 우리에게 오지 못하고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고, 그 지연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아득하다.

이전까지 나는 기억에 ‘굳히기’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에 차마 그런 과정이 필요하리라 떠올릴 수 없었다. 제대로, 맞는 형태로, 단단히 굳는 것을 지키고 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추측들, 그것이 겹치며 그려지는 대략의 상 정도로는 불충분하다. 합당한 추측이라 해도 사적 영역에 머물러서는 부족하다. 공공의 발화자가 명명백백히 밝혀진 진실을 말하고 기록해야 한다. 이 공공의 기억을 확립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훼손된 기억 때문에 나락으로 자꾸 미끄러지는 공동체들의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에,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되는 것을 온 방면으로 막아야 한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처참함을 이겨내고 아직 고정되지 않은 기억의 울타리가 될 시민들이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막아서는 방어선이 단단하기를 기도한다. 분명하게 굳어 누구도 함부로 왜곡하거나 오염시킬 수 없는 기억, 설령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전부가 세상을 떠도 그대로 남아 변질되지 않을 기억이 간절하다. 입에 담기도 싫은 음모론자들의 허언과 달리, 세월호의 유족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바라온 것이 바로 그 기억일 것이다.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탑과 같은 기억 말이다.

인구 100명 중에 4명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책을 읽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이해에 다다랐는지, 더 착잡해졌는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안전과 존엄,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유족들의 목소리를 묵살하며 그것이 어떤 정치적 저의의 발화라고 왜곡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 네 명에 가까울 것이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 않을지 짐작해본다. 머릿속에 진영 싸움과 힘의 논리만 가득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그렇게만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모욕과 조롱을 할 기회만 있으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는 사람들이 또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나, 비명을 지르고 싶어지지만 100명 중 4명이 언제나 그래왔다면 더 중요한 것은 나머지 96명의 역할이지 않을까 한다. 언젠가부터 자극적이기 그지없는 4명의 목소리만 들리고 시민으로 기능하는 96명의 목소리는 배경음처럼 취급되고 있다. 그 유독한 흐름이 더 거세어지기 전에 바꿔야 하지 않을지 염려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안전법은 유족들이 만들었다. 몇 백 년 전부터, 어느 나라에서든 그래왔다. 왜 사회는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발전해왔을까? 그 책임을 모두 조금씩 더 나눠 졌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말하면 다음 사람이 이어 말하고 어깨와 어깨가 촘촘히 맞닿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일단은 이 에세이를 쓰고, 그다음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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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에세이를 통해, 공함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월간 십육일에서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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