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정지향] 고백할 수 있어서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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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향


2023년 10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정지향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고백할 수 있어서 >

  몇 주 전엔 동료와 함께 여의도 공원에 갔다. 9월 10일, 그러니까 세계자살예방의 날을 하루 앞둔 토요일이었다. 오후 내 유난하던 가을볕이 누그러질 즈음 캠페인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넓게 뻗은 대로를 가로질러 공원으로 모여들었다. 동료와 나도 미리 티셔츠를 챙겨 입고 온 참이었다. 공원을 빙 둘러 무대며 후원사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깃발과 풍선,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들뜬 기운이 맴돌았다.

<생명사랑 밤길걷기>는 한국생명의전화가 주최하는 자살예방 캠페인으로, 올해 벌써 18회를 맞는다고 했다. 여의도라면 평소에도 자주 오가는 곳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곳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만여 명이 몰리는 행사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 좀 놀라웠다. 이 밀도 높은 도시의 한가운데서 타인들과 얽히고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이 늘 버거웠는데, 알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것에 늘 노출되어 있다고 투덜댔는데, 실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지근거리에서 사람들이 모여 내는 큰 목소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36.6km를 밤새 걷는 긴 코스와 7.1km를 걷는 짧은 코스가 있었다.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이 행사는 한국 사회의 자살 문제를 직시하고, 자살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열린다. 자살로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고, 나와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마음을 다지며 함께 걷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런 마음을 되새기자면 7.1km 보다는 더 많이 걸어야 할 것 같았는데 36.6km는 엄두가 안 났다.

이 구체적인 숫자는 통계에 따라 매년 약간씩 달라진다. 36.6은 한국에서 하루 평균 자살하는 사람의 수, 7.1은 청소년 10만 명 당 자살사망자의 수라고 한다. 고민하는 사이 긴 코스의 참가 신청이 마감되기도 하여서, 우리는 청소년 자살 예방을 위해 7.1km를 걷기로 했다. 나와 동료는 모두 자살유가족이면서 동시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오래 해왔다. 청소년 우울·자살 행동 위험군이 크게 증가한 근래의 상황에 관심도 많았다. 그러니 청소년들을 위해 걷는 것도 합당한 일인 듯 느껴졌다.

예상대로 걷기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수월히 끝났다. 노래를 부르며 걷는 대학생들도, 자꾸만 뛰쳐나가는 아이를 챙기느라 정신없는 가족들도, 휴대폰 게임을 하며 걷는 커플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동료와 나 역시 일상적인 대화를 간간히 나누며 걸었다. 땀이 약간 날 법 할 때마다 강바람이 불었다. 행사 내내 사뿐히 반복되던 ‘넌 소중해’, ‘희망을 향해’, ‘생명 사랑’ 같은 구호들, 그러니까 틀렸달 순 없지만 어쩐지 공허한 말들을 두고 동료와 나는 좀 투덜거리다 헤어졌다. 홈페이지에서 설명하던 것처럼 작금의 상황을 왜 조금 더 마주 볼 수는 없는지. 밝은 노래를 부르고, 포토 부스에서 포즈를 취하는 동안 어쩐지 자살이라는 문제는 더 어두운 곳으로 숨겨진 것이 아닌지 돌아오는 길이 좀 씁쓸했다.

그러나 짧은 거리일지언정 두 다리를 움직여 걸었기 때문일까, 그 숫자들에 대한 생각은 오래 남았다. 내년에는 조금이나마 더 걷게 될 것인지, 덜 걷게 될 것인지 지켜보게 되겠지. 꾸준히 체력을 키워 긴 거리 걷기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보았다. 나는 사실 숫자에 약한 사람이다. 하루 36.6명은 직관적이지만, 10만 명당 7.1명이라고 하면 쉽게 그 규모를 떠올리지 못한다. 이럴 때는 ‘십만 명’ 부분은 그냥 잊어버리고 일곱 명의 학생을 생각해 본다. 각기 다른 속도로 자라고 있었을 몸과, 서로 다른 학교 심볼의 생활복. 마라탕과 떡볶이 중에선 무엇을 골랐을지, 어떤 유튜브를 보고 무슨 노래를 들었을지, 너무 좋아해서 마지막까지 두고 가기 싫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남은 사람들을 위해 쓴 문장은, 쓰지 못한 문장은 무엇이었을지.

돌이켜보면 이런 상상력은 다 남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숫자에 압도되는 대신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 2014년 이후 9년이 흐르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내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예를 들면 참사 당일 진도로 뛰어 가 물속에서 건져진 휴대폰을 곧장 약품처리 한 포렌식 전문가나 ―그를 통해 학생들의 마지막 메시지와 목소리가 복원되어 전해졌다―, 유가족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즈음 학생들의 방을 구석구석 찍어 기획 기사를 낸 젊은 기자들 ―캐릭터 인형이나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 색 바랜 베갯잇들이 놓인 방들이었다―, 생존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떠난 학생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새로 길어 올려 기록해 온 작가들에게서 말이다. 그들을 통해 불가해한 슬픔과 분노에 짓눌리지 않고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법을 겨우 배워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감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지난여름에는 304낭독회에서 처음 낭독을 했다. 짧은 시를 읽기 전, 304낭독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채감을 고백했다. 오래전 낭독 요청을 거절한 일에 대한 것이었다. 참사 후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고 혼란 속을 허덕이고 있을 때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참사에 대해, 혹은 내 상황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당시의 나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이 마음 한편의 그늘이 되었다. 살면서 쌓아가는 마음의 부채가 대개 덜어질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낭독 요청을 받았을 때는 일정표를 열어보지도 않고 그러겠다 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당신들의 덕을 또 받고 말았다고, 아직 다 되지 않은 문장이라도 이제는 발음해보려 한다고, 거기 서서 고백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정지향 (작가)

2014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작품

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토요일의 특별활동」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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