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박혜지] 겹침, 주름들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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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지


12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박혜지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겹침, 주름들 >

 

 

그날은 지인들과 북촌 골목을 걷기로 한 날이었다. 징조? 징조가 있었다면 가을 하늘 공활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이었다는 것, 주말을 맞은 북촌 거리에 사람이 무척 많았다는 것, 골목에 아기자기 자리 잡은 몇몇 상점들에서 할로윈을 상징하는 호박 장식을 보았다는 것, 낼모레면 10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잊히지도 않고 떠올랐다는 것, 때문에 조금은 센티멘털해졌다는 것, 그런 것들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는 것들. 한옥마을과 할로윈이라, 흥미로운 조합이네. 농담인 듯 그저 웃으며 지나쳐도 되는 것들. 영어와 일본어와 중국어로 쓰인 어느 전통음식점의 길거리 메뉴판 같은 것들. 단풍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그날, 북촌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날 나는 몹시 피곤했다. 낮밤이 바뀐 생활습관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한 데다 갑자기 너무 많이 걸었다. 스마트폰 어플을 확인한 지인이 총 1만 2천보를 걸었다고 말해줘서 더욱 피곤하게 느껴졌다. 막걸리 마시자는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 이미 해롱해롱했다. 섭섭해 하는 지인들을 등 뒤에 남겨두고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잠시 고민하다가 지하철을 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다.

깨어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안전안내문자가 도착했다.

[서울특별시청]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호텔 인근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통제중입니다. 인명사고 우려로 해당지역 접근자제 부탁드립니다.

밤 12시 04분이었다. 불이라도 났나? ‘이태원 해밀턴호텔’로 검색해보았다. 순간 눈앞에서 노란 나비들이 후루룩 날아올랐다.

나는 아무래도 느린 사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슬픔이 찾아왔다. 어째서인지 10·29와 4·16이 자꾸만 겹쳐졌다. 모든 게 그때와 닮아보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사회적 참사 앞에서 더 빨리 예의를 지킬 줄 알게 되었다는 것,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뭣이 중헌’지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4·16이 남긴 유산이겠는데, 어쩐지 이 유산을 원래부터 선량했던 사람들끼리만 나눠 갖게 된 것 같아서, 어떤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이 귀중한 유산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진 것 같아서 내내 화가 났다.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관련 기사가 저절로 검색되었다. 당국의 무책임한 대응과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관료들에 관한 기사들 사이로 가슴 뭉클한 기사가 종종 보였다. 이번에는 ‘청자켓을 입은 의인’에 관해서였다. 그는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비교적 안전한’ 난간 위로 끌어올렸고,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온몸으로 버티며 많은 이들을 구했다고 했다. 기사를 읽는 순간 ‘청자켓을 입은 의인’ 위로 한 사람이 겹쳐졌다. 일명 ‘파란 바지 아저씨’다.

그는 세월호의 영웅이었다. 2014년 4월 16일의 그 바다에서 가장 많은 승객을 구해냈다. 그는 제주섬과 육지를 오가는 화물트럭 운전기사였고, 건강하고 날렵한 신체의 소유자였다. 그는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을 당시 누구보다 먼저 탈출했다. 그가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려고 했을 때, 검푸른 물결 위로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는 딸아이와 같은 얼굴을 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미친 사람처럼 아이들을 구해냈다. 마치 그것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내가 만난 그는 한 점 검은 그림자일 뿐이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을 구조했으나 정작 자신의 영혼은 건져내지 못한 것처럼 그는 허깨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 반쪽이 되었다는 말을 그처럼 여실히 목도한 적은 없었다. 그동안 몸에 붙었던 살들이 다 내려 빼빼 마른 그는 서 있기조차 힘든 듯 했고, 얼굴 가득 드리운 그림자는 너무 검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옆에 가까이 귀를 대고 있어도 그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말소리 속에는 한숨이 절반가량 섞였고, 그 숨소리는 거칠고 가팔랐다.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듯, 그는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한참을 침묵했다. 그 침묵 또한 너무 무거웠다.

처음으로 말을 배우는 사람인 듯, 혹은 이 세상에 마지막 말을 내려놓는 사람인 듯 그가 힘겹게 힘겹게 꺼내놓은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죄스럽다.”

더 많은 아이들을 구했어야 했는데, 아니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스럽다는 것이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선실에 난 유리창을 두들기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면 죽을 것처럼 미안해져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미칠 것 같은 마음을 스스로 어쩌지 못해 그는 밤이고 낮이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아무 산에나 올라가 들짐승처럼 며칠을 헤맸다. 집에 있을 때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고, 다시 정신이 들면 그길로 뛰쳐나가 울부짖으며 산을 헤매는 들짐승이 되었다.

더 처참한 건, 딸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탈출의 순간 그의 발길을 붙잡았던 딸의 얼굴, 침몰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구조하게 만들었던 딸의 얼굴, 가슴이 미어지도록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그는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꾸만 피하려 들었다. 딸의 얼굴을 보면 물에 휩쓸리던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이 생각나 괴롭고 슬펐다. 딸이 예뻐 보이면 예뻐 보일수록 더 큰 고통이 밀려왔다. 급기야 그는 딸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 미워하게까지 되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또 다른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러면 그에게 다시 울부짖는 짐승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를 만난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몇 차례인가 자해를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사 이후 정부는 그에게 ‘적정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그가 그 돈을 수령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닌 시간 속에 남겨진 그에게 ‘적정한’ 보상이란 게 과연 가능한지 묻고 싶을 뿐이다.

사회적 참사의 현장에는 언제나 ‘의인’ 혹은 ‘영웅’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어도 이들은 언제나 ‘반쪽짜리’일 뿐이다. 감사와 칭송의 말들에 앞서 당연히 받아야 할 보호와 보상은 이들의 차지가 아니다. 기실 이 말도 ‘반쪽짜리’다. 보호와 보상이란 참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10·29 특별수사본부가 구성되었다. 지난한 여정 끝에 활동을 마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권고사항이 그저 ‘권고’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수사도 권고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관련자의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똑같은 사회적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29에 4·16이 자꾸만 겹쳐지듯 또 다른 사회적 참사에 10·29가 겹쳐지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한다. 영웅이 없어도 살기 좋은 세상, 하여 영웅이 더 이상 탄생하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 여기에 쓴 ‘파란 바지 아저씨’에 관한 내용 중 일부는 <삶이 보이는 창> 2016년 봄호(통권 106호)에 실린 저의 글 「지겹도록 잔인하고 식상한」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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