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 정지우] 애도하는 사람은 아주 귀중한 주체다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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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2023년 3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정지우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애도하는 사람은 아주 귀중한 주체다 >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중)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매우 특이한 저서들을 몇 권 남겼다. 대표적으로 <사랑의 단상>은 사랑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면서, 에세이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한 기묘한 책이다. 책에서는 각종 철학자들과 철학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아주 논리적으로 사상이 전개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파편적으로 서술한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1인칭인 화자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거의 전무후무한 ‘스타일’의 책을 남긴 것이다.

<애도 일기> 또한 참으로 ‘특이’하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의 파편적인 기억들을 남긴 것이다. 제목 그대로 일기집인데, 그 일기들이 매우 솔직하면서도 바르트의 철학을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평생 어머니를 각별하게 생각했기에, 어머니의 상실을 받아들이기 무척 어려워했다. 이 책에는 그 우울과 애도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때론 파편적인 비명처럼, 때론 흘러내리는 눈물의 조각처럼, 글들은 온갖 기억과 생각을 넘나든다.

책의 스타일 자체도 특이하지만, 그 내용도 독특하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애도를 이야기하면서, 이 애도와 우울은 무엇보다도 ‘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애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아주 귀중한 ‘주체’라고 말한다. 심지어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 시스템이 통합된 존재라면, 애도하는 사람 만큼은 더 이상 시스템에 통합되지 않은 존재라고 한다. 즉, 애도하지 않는 사람과 애도하는 사람을 구별하는데, 애도하는 사람이 더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뉘앙스마저 남기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시스템에 통합되어 살아간다. 즉, 이 사회의 온갖 규율과 형식, 체제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로 살아간다. 내가 어릴 적부터 꾸던 꿈이나 갖고 싶은 직업도 대개 타인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들이다. 단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꿈은 그저 세상에서 좋다고 규정한 학교에 가서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직업을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소에 소비하며 즐기는 것들도 모두 타인들이 만들어놓는 것들이다. 우리가 가고 싶은 여행지, 사고 싶은 브랜드의 옷,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 등 모든 것들이 이 사회 시스템(유행)에 따라 우리가 그저 좋아하는 것들이다. 달리 말해, 그 모든 건 모두의 욕망이자 ‘타자의 욕망’이지, 나만의 진짜 욕망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롤랑 바르트는 ‘애도하는 사람’ 만큼은 ‘진짜 주체’ 또는 ‘진짜 나’가 된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 그 애도를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 그 애도 속에서 밖으로 나가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 시스템은 그가 ‘애도 밖’으로 나오길 바란다. 애도 밖으로 나와서, 다시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소비하며, 남들처럼 열심히 사회 시스템의 일부 또는 부품으로 사회를 작동시켜 나가길 바란다. 그러나 애도하는 사람은 그 모든 걸 ‘중단’시킨 채로, 집요하게 자신이 상실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애도하는 사람은 아주 귀중해진(아주 드물고 희귀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한 주체가 된다. 모두가 타자의 욕망을 좇으며 시스템 속 존재로 살아가지만, 애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애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그것이 별다른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애도를 선택한다. 그렇기에 그는 남들처럼 ‘자기 이익을 좇는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인 존재’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때의 도덕이란, 그 자신만의 도덕, 이를테면 ‘그를 결코 잊지 않겠다’라는 도덕이다. 누구도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는 그는 순수한 자기 결단으로, 진짜 자기만의 욕망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애도’는 흔히 말하는 정신분석학에서의 ‘애도 작업’과도 다르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애도 작업이란 상실에 빠진 사람을 ‘낫게’ 하여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는 걸 목표로 한다. 그래서 애도와 우울 속에 있는 사람을 ‘꺼내어’ 치료하고 다시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 돌려보내면, 정신분석가는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자신은 낫지 않겠다고, 계속 애도하겠다고 하면서 ‘치유’에 저항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도가 그 자신의 고유한 결단이고, 주체가 되는 길이라 하여도, 그 순수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대부분은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와야 하고, 다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일상을 일궈가야 한다. 롤랑 바르트도 처음에는 이 애도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골몰하지만, 일기 후반부로 갈수록 애도의 다음 단계랄 것을 고려하게 된다.

가장 상징적인 부분은 그가 “그녀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쓴다”라고 적는 부분이다. 이후 그는 다시 적는다. “그녀가 사랑했던 것, 그것들이 나의 가치들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애도의 다음 단계를 찾아간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준 가치들을 기억하면서, 그 가치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다.

애도의 다음 단계는 그 사람을 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간직하는 방식이다. 그 사람이 내게 주었던 가치들, 그 사람이 살고자 했던 삶, 그 사람이 가치 있다고 믿었던 것을 내가 실현하며 사는 삶이다. 마치 그가 내 안에 현현하듯이, 그의 마음과 가치를 놓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의 명랑이나 믿음이나 희망이나 꿈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게 애도는 끝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대개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를 잊고 삶에서 지워버리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가 찾아간 길처럼, 오히려 그를 더 간직하는 방식으로, 슬픔을 끌어안고 애도를 지속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를 잊지 않고 사랑하면서 그를 위하여, 귀중한 주체의 길을 걸어나갈 수도 있다. 그런 주체로 걸어나간 이후의 길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길이라는 것도 존재할 것이다. 길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고, 우리는 그 중 하나의 길을 택하여 걸어간다. 누구에게나 맞는 저마다의 길이 있기 마련이다. 애도의 길 또한 마찬가지다.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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