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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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지 혜
5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유지혜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사랑은 시간을 얼린다 >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중에서 / 문학과 지성사
새해가 되자마자 별자리 운세를 봤다. 올해는 <뚜껑을 여는 해>라고 했다. 꺼내보기 두려운 뚜껑을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기치 못한 보물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 유리병에 든 것은 잊혔던 과거의 무언가일 것이다. 그게 무엇일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곧 비행 편이 열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표를 끊었다. 오랜만에 기내식을 먹으며 십 년 가까이 지속된 이 습관적 경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일기장 몇 개를 버렸다. 다가올 수많은 지금들을 담아내려 기억의 창고를 비운 것이었다. 보란 듯 여행을 떠났다. 사이사이 돌아오는 일정이 끼었을 뿐 사실은 이십 대라는 긴 여행. 그곳에서 나는 지금을 사는 법을 배웠다. 여행에서는 그날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흥분해서 적은 글도 내일 보면 시시했다. 여행자는 어제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지금뿐인 나만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산뜻하게 지금만을 살 수 있었던 건 내가 아직 스물셋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2014년 여름이었다. 내게는 아직 책임질만한 과거가 없었다. 뉴스 속 지난봄의 절망도 내게 이미 과거가 되어있었다. 나의 애도는 인간적이었으나 동시에 일시적이었다. 외국에서 시간은 내 멋대로 만져졌고 나는 내 삶을 소화하느라 바빴다. 그런 와중에 울컥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감정을 절제했다. 이따금 누군가 그 학생들을 알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치졸한 공감으로 급히 대화를 마무리하며, 마치 내 것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슬픔을 치워버렸다. 나는 용기가 없어 그들을 몰래 추모했다. 더 큰 자유를 누리고 꿈에 그리던 젊음을 손에 쥘수록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여행은 이내 모든 걸 끔찍하리만큼 깨끗이 지워주었다. 나는 이곳, 지금,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잊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내가 느꼈던 <지금적인 기분>은 철저하게 보존된 과거 속이었다. 나는 127년 전에 지어진 건물, 52년 전 만들어진 도로, 39년 전 시작된 이발소에 매료되었다. 그건 반짝반짝 윤이 나게 사랑받은 낡음이었다. 그들의 과거는 나의 지금보다 아름다웠다. 그들은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건 시간을 해치는 잘못된 방식이었다. 오래된 계단, 느린 우편, 매번 낑낑대게 만드는 열쇠 구멍은 파리를 파리로 만들고, 뉴욕을 뉴욕답게 했다. 나는 그 구닥다리 세월의 흔적이 나를 기쁘게 괴롭히는 일을 여행이라 불렀다.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면 찬란한 지금을 만끽할 수 없었다. 잘 가꿔진 과거는 어쩌면 그 도시들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 거리를 걸을 때에는 일개 여행객마저 공동의 책임과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초보 여행자인 나는 ‘지금뿐’이라는 여행 패키지의 유치한 구호를 따라 했지만 정작 그곳에서 내가 느낀 것은 과거에 갇히는 행복이었다. 그게 마치 나의 과거인양 착각하면서. 과거에 갇힌다는 건 도시의 일부가 되는 일이었다. 기꺼이 그 도시의 일부가 될 때 나는 사랑에 빠졌고, 시간은 때때로 멈추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시절이 돌아왔다. 나는 과거를 살고 그걸 나의 지금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 떠나왔다. 이 년 만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점괘가 말한 뚜껑이 드디어 열렸다고 생각했다. 나한테는 전부였던 여행이 재기되는 것 말고 어떤 보물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예상외로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즐거웠지만 보물을 찾았다는 환희는 없었다. 내게 여행은 이제 정말 과거일 뿐이었고 도전이 아니라 안주였다. 뚜껑 안에는 분명 더 어마어마한 게 들어있을 것이었다. 안전하고 예쁜 여행 따위가 아닌.
그러다 여행 중 이 원고를 의뢰받았다. 그때 나는 즉시 직감했다. 유리병 속 내용물이 4월 16일이라는 것을. 글을 쓰기 위해 뚜껑을 열었다. 8년 만이었다. 뚜껑 밑 비겁한 나를 직면했다. 다시 찾은 오래된 슬픔은 자극적인 슬픔들에 자리를 뺏겼다. 그때의 나처럼 사람들은 새롭고 개인적인 슬픔을 찾아 떠나버렸다. 몇 백 년째 꿋꿋이 버티고 있는 건물들에 비해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은 그날은 어떻게 무너졌을까. 왜 일상 안에 머물러 있는 사건이 아닌 단지 사적인 상처로 취급받았어야 했나. 세월호는 비어있는 도시였다. 우리는 슬픔을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겼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찾을 자유만을 생각했던 내가 수치스러웠다. 그동안 더 낡았을, 더 외로웠을 그 배 안팎의 사람들을 잊고 나는 혼자 안전했다. 나는 뉴욕의 택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활기의 상징인 그 노란색은 난생처음 다르게 보였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종종 내가 아닌 그들의 여행을 생각했다. 노란 기억은 나의 소지품이 되었다. 그날의 승객들을 내 주머니 속에 넣어 우리는 함께 뉴욕 거리를 걸어다녔다. 상기된 얼굴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으로 만들어진 여행의 표정들을 마주하면서. 그 표정 앞에서 나는 질문했다.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몇이에요. 그날 아침은 무엇을 먹었어요. 어떤 여행을 꿈꿨나요. 옆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전날 잠은 잘 잤었나요. 설렘이 공포로 변했을 때 어떻게 견딜 수 있었나요. 누굴 끝까지 생각했나요. 지금은 잘 지내고 있나요. 그곳은 이곳보다 훨씬 다정한가요. 전부 묻고 싶었다. 시시콜콜 끝이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생각 속을 걸으며 나는 다시 과거를 쌓아올렸다. 잊고 있던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그러면 그날이 생생하게 그려지곤 했다. 오래될수록 더 선명한 이곳의 빌딩과 성당처럼. 마침내 그날은 나의 실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날을 새롭게 슬퍼했다. 그건 너무 늦게 도착한 나의 애도였다. 낡은 슬픔은 새 것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그대로 담은 채, 윤이 나게 닦여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다시 찾은 온전한 애도 앞에서 생각했다. 그날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지금의 시간을 덧대어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게 아니라 상처를 상처인 그대로 지켜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이의 뚜껑을 열어야 한다고. 뚜껑을 여는 용기 앞에서 시간 은 얼어붙고 그 용기가 그물이 되어 모두를 구조할 것이라고. 상처를 직면하여 그것을 내게 일어난 일로 만드는 작업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4월 16일 그날이 더 이상 숨겨진 과거, 슬픈 풍문이 아닐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내 눈앞의 반짝이는 도시들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십 대 애들, 아저씨, 부부, 선생님, 승무원을 더 많이 사랑하기 시작했다. 죽음은 시간을 잊히게 하지만 사랑은 시간을 얼린다. 함께하는 기억으로 우리의 초침은 부러질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과거에 갇힌다. 영원한 멈춤을 약속하는 것은 이제야 보내는 나의 작별 인사다.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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