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핫펠트(예은)] 12월 3일 금요일

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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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펠 트


12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2007년 그룹 ‘원더걸스’로 데뷔한 후,

현재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핫펠트(예은)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12월 3일 금요일>

 

 

 

 

 

 

오늘, 4.16재단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문화제에 다녀왔다.

대기실에 들어가 보니 노란 리본 배지와 팔찌, 생존자 학생들로 이루어진 ‘메모리아’에서 제작한 여러 개의 스티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스티커는 이대로 가져가면 잃어버릴 것 같아 전부 핸드폰 케이스에 붙였다. 오른쪽 어깨 밑에 배지를 달고, 왼쪽 손목에 팔찌를 찼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공연 전 인터뷰가 있었다. 인터뷰를 진행해 주신 분은 지난 안산에서의 강연 행사에도 계셨다고 했다. 나 그때 살짝 울먹거렸던 거 같은데, 좀 창피했다. 가벼운 근황 질문이 있었고, 후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나는 그날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사실은 딱 한 장면이다. 잔잔한 바다에 기울어진 배. 그날따라 유독 일찍 일어나 티비를 켜고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를 봤고, 전원 구조라는 자막을 보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고 요즘이 어떤 시댄데. 무사히 구조돼서 다행이다.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하며 안도했던 기억. 오보라는 기사를 다시 접하고 그 뒤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하루 종일, 매일같이 기사를 찾아보고, 슬퍼하고 분노했던 날들이 지속되었고, 사건 당일의 충격보다 그날 이후 매일매일의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내가 그때 느꼈던 절망감과 분노를 설명하기엔 인터뷰는 너무 짧다.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가려는데 관계자 한 분이 선물 상자를 주셨다. 희생자 어머님들이 만든 나비 브로치와 스커프라고 했다. 감사 인사 후 뒤를 돌아서는데 목이 막혔다. 지금 울면 정말 큰일이라 얼른 대기실로 들어가서 리본 배지 위에 나비를 달았다. 이 나비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썸머 타임”과 “새 신발” 두 곡을 부르고 나서 MC인 스테파니 언니와의 중간 인터뷰가 있었다. 역시 가벼운 몇 가지 질문을 지나, 조금은 어려운 질문이 나왔다.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다음 네 가지 중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책임, 평등, 안전, 관계 중에서요. 물론 네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요.”

 

나는 평등과 관계, 두 가지를 꼽았다. 그중에서도 먼저는 평등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평등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고, 동등한 인격체라는 존중이 있을 때 모두의 안전을 고민하고, 비로소 모두의 책임이 된다.

 

나는 평등하지 않기에 대화가 단절되는 상황을 종종 겪었다.

 

“난 배 타고 제주도 갈 일 없으니까 상관없어.” 세월호 참사 이후 실제로 들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 공감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은 불확실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배를 타지 않아도 지하철이, 어떤 대교가, 자주 가는 백화점이 무너질 수 있고, 강한 신체적 힘 역시 사고로, 혹은 병으로, 자연스러운 노화로 언제든 잃을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나비 브로치와 노란 배지를 빼고 옷을 갈아입었다. 줄로 된 노란 리본을 자주 매는 가방끈에 달았다. 리본 스티커를 노트북에 하나, 냉장고 문에 하나 붙였다. 남은 스티커 몇 개를 어딘가 붙이고 싶은데 뭔가 떠오르지 않는다. 팔찌와 배지는 금방 또 잃어버릴 것 같지만, 나비 브로치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데. 책상 서랍에 넣어두자니 의미가 퇴색될 것 같고, 옷에 달고 다니자니 어딘가에서 흘릴 것 같다. 나는 왜 이렇게 덜렁대는 걸까.

 

사실은- 나는 올해 4.16을 잊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차 넘버가 0416인 것을 보고 ‘어 저거 뭐였지, 누구 생일이었나?’ 하다가 한참 뒤에야 ‘맞다, 세월호, 그날이구나’ 한 적도 있다. 4월 16일엔 ‘어 오늘 무슨 날이었던 거 같은데 .. 누구 생일이던가?’ 하다가 다음날쯤 깨달아서 추모글을 쓰지 못했다. 섬세하지 못한 탓인지 주변 친구들과의 기억, 가족들과의 추억도 다 잊어버리는 나지만 4.16만큼은 절대로 잊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누군가 계속 기억하고, 말해주지 않으면, 사람은 정말 쉽게 잊는다.

그래도, 만약 내가 내년 4월 16일을 까맣게 잊는다 해도, 17일에, 18일에 떠올릴 거다. 5월 26일에도, 7월 무더운 여름날에도, 추석에도, 다시 돌아오는 12월 3일에도 기억할 거다. 그렇게 절대로, 잊지 않을 거다.


About 《월간 십육일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에세이를 통해, 공함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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