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십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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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수
2023년 9월의 《월간 십육일》에서는 최현수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 당신과 나의 달력 >
TV 뉴스에서 전원 구조 오보를 들었을 때 나는 열여섯이었다. 학교에 있을 때 지나가듯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모두가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배가 침몰하자마자 빠르게 구조대가 와서 승객 전원을 육지로 데려가는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뉴스였음을 알고 난 뒤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침몰 뉴스를 들은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나있었기 때문이다. 왜 아직도 사람들이 구조되지 않았지? 모든 TV 채널에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뱃머리의 밑바닥이 중계되었다. 밤에는 거짓말처럼 거대한 손이 나타나 배를 번쩍 들어 올리는 꿈을 자주 꾸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세월호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미술 시간에 선생님은 4B연필로 4절지 스케치북을 채워보라 했고, 나는 침몰하는 세월호 그림을 그렸다. 4B연필로 뱃머리의 밑바닥을 그리고, 배 근처로 다가오는 선박들을 그리고, 연필 끝을 마구 문질러 명암을 입혔다. 수면 위로 거대하고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에 대해서 무어라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세월호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선생님이라면 알아봐 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내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교실 뒤편에 걸렸다. 다들 그것에 대해 말하길 꺼리는 듯했다. 그렇게 4월이 지나갔다.
열여덟이 되던 해에는 친구의 추천으로 지역의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평소에 사회 문제를 함께 얘기하면서 학교에서 생기는 불만을 털어놓던 친구였다. 그곳에서는 혼자서 끙끙 앓던 얘기들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꼭 행동으로 옮겼다.
세월호 참사의 생존학생과 희생자 형제자매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읽은 뒤 북콘서트를 기획했다. 청소년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다시 봄이 올 거예요』의 기록자 선생님을 만나고, 희생자의 형제자매와 직접 만나 함께 북콘서트를 준비했다.
언젠가 북콘서트 홍보 포스터를 들고 학교에 갔다. 붙이기 전에 그래도 말은 해놔야 할 것 같아서 교무실로 향했다. 학년 부장 선생님에게 북콘서트에 대해 짧게 소개하고는 포스터를 붙여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돌아온 답변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정치적인 행위는 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쉽게 물러설 수 없어 몇 번이나 말이 오간 끝에, 학교의 일부 게시판에만 붙이도록 허락을 맡았다. 나는 몰래 모든 학급을 돌며 학급 게시판에 포스터를 붙였다.
그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읽었다. 자습실을 돌며 감독하고 있던 교감 선생님이 내 뒤로 슬며시 다가오더니, 책을 뒤집어 표지를 보고는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너무 한쪽으로 쏠려서는 안 된다고, 언제나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감 선생님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책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스물넷이었다. 할로윈을 맞아 이태원을 찾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는 당시 교환학생으로 가있던 대만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생일 전야를 보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길거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몇 주간 마음이 무거운 채로 지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대부분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와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한국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면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 같다고,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열여섯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열일곱과 열여덟이, 더불어 열아홉과 스물이, 그에 더해 스물하나와 스물둘, 스물셋이 떠올랐다. 이해되지 않는 죽음은 매년 일어났다. 여행을 갔다가, 친구들과 놀다가, 현장에서 일하다가 죽었다.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불신의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고, 누군가를 추모할 권리조차 여전히 싸워 얻어내야 했다. 죽음을 쉬쉬하는 공기는 여전히 무겁게 짓눌러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보다도 이해되지 않은 채로 그저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게 더 무서웠다.
그리고 스물다섯의 새해가 밝았다. 나는 매년 1월 1일마다 가족과 친구들의 생일을 달력에 표시해둔다. 까먹지 않고 축하해주기 위해서다. 생일을 다 적고 난 뒤에는 추모할 날들을 표시해둔다. 잊지 않고 꼭 기억하기 위해서다. 4월 16일을 찾아 적었고, 10월 29일을 찾아 적었다. 추모할 날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매일 추모와 축하를 하다가 일 년이 다 지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은 채로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붙드는 일이다. 그저 열여섯에 본 뉴스로 잊히지 않게, 스물넷에 접한 충격적인 소식으로 잊어버리지 않게.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면 오래전 무겁게 내려앉던 침묵에 잔잔한 파동이 생긴다. ‘다 지나간 일’을 다시금 이야기한다는 건 그런 의미가 있다.
가끔 당신의 달력에는 어떤 날이 표시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매년 돌아오는 4월 16일에 쌓인 기억과 앞으로 쌓여갈 기억들이 궁금하다. 기억에 지층이 있다면, 그래서 무지개떡처럼 그 기억을 잘라서 볼 수 있다면, 모든 층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적혀있으면 좋겠다.
……
최현수(작가)
이야기를 쓴다. 주로 소설과 희곡.
이야기가 필요한 이름들을 종이와 무대 위로 호명하기 위해 읽고 쓴다.
작품
안전가옥 앤솔로지 『이중생활자』 중 「열일곱, 여름, 전쟁」 등
《월간 십육일》은 매월 16일 4.16세월호참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작가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주제의 글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자고 합니다.
*연재되는 모든 작품들은 4·16재단 홈페이지,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레터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